꼬리가 몸통 뒤흔드는 우리사회 ‘해괴현상’을 보자

I. 본말전도

작년 12월 이명박 대통령을 당선시킨 국민들의 뜻은 흔히 ‘진보’보다 ‘보수’, ‘좌’보다 ‘우’의 선택에 있다고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의 출범을 지지한 국민들에게 왜 보수를 선택했느냐고 묻는다면, 다시 ‘보수’와 ‘우’라고 대답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순히 파당싸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세력은 지난 세월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지난 10년을 선진국가로의 기반을 형성하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했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순전히 잃어버린 것만이 문제라면, 비록 늦더라도 다시 찾으면 된다. 문제는 더 심각한 곳에 있다. 그것은 광우병 촛불시위, 금강산 및 독도 등 한국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여러 사건들과 과거 및 현 정부의 정책들에서 드러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사회가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지엽인지, 심각한 본말전도의 성향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광우병 촛불시위의 경우,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에 대한 허위와 진실이 뒤집혀 국민들 다수는 아직도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있다. 진실과 거짓의 본말전도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추적해 보면 불과 10명이 안 되는 자칭 광우병 전문가들이 공식정부기관 및 다수의 보건관련 전문가들을 침묵시키고, 진보언론과 반미친북 시민단체와 합세하여 국민들에게 잘못된 믿음을 심은 것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본말전도가 일어났다.

게다가 이명박정부의 대처는 “눈이 펑펑 내릴 때는 쓸어도 소용없다”는 대통령의 말처럼 촛불시위가 그냥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사실상 없었다. 국내외의 학자와 전문기관의 힘을 빌려 왜곡, 과장, 선동에 적극 대처하는 정공법을 포기하였다. 행동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뒤집힌 본말전도였다.

또 광화문과 세종로가 무법천지가 되었을 때도 정부의 대처 역시 본말전도였다. 평화적이고 합법적 시위의 경우 경찰의 의무는 민주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고, 불법과 폭력시위의 경우 경찰의 의무는 이에 상응하는 진압이다. 이것이 공권력으로서 경찰의 본업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친북좌파 시민단체와 진보언론의 강경진압 비판에 밀려, 이명박정부는 “법을 엄정히 집행하되, 다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합법적 시위와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불법 폭력시위에 경찰이 ‘하나의 방법’으로 대처하라는, 사실상 전혀 대처하지 말라는 명령과 다름이 없었다. 본말이 전도된 시위에 대처하는 경찰의 임무를 또 다시 뒤집은 이중의 본말전도를 이명박정부는 감행했다.

대북정책에서도 본말전도는 이제 지속적인 상황이 되었다. 지난 10년 햇볕정책의 목표는 북한의 개혁개방이었다. 즉 햇볕정책은 수단이고 목적은 북한의 개혁개방이지만, 작년 노무현-김정일 회담에서 드러났듯이 북한은 개혁개방이라는 햇볕정책의 원래 목표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음이 확인되었다. 즉 햇볕정책의 지속은 목표와 수단이라는 본말의 관계를 뒤집는 결과가 되었다. “햇볕이 외투를 벗긴다”는 이솝우화에서 유래한 “햇볕정책”이라는 명칭이 유명무실(有名無實)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정부는 故 박왕자씨가 금강산에서 피격 살해된 날 북한에 6․15 및 10․4 선언을 언급하며 사실상 변형된 햇볕정책을 제의하였다. 이중의 본말전도가 대통령의 국회연설에서 하나의 행위를 통해 일어났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망언에 대한 대처에서도, 이 경우는 지난 정권의 잘못이지만, 본말전도가 일어났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할 경우 대응의 근본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무화(無化)시키는 일이다. 마치 여름이면 모기떼가 나타나듯이 매년 반복되는 일본의 독도망언에 한국정부와 한국국민의 대응은, 역시 모기에 물렸을 때처럼 조건반사화된 감정적 반응이었다. 중요한 점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다. 물론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분명 한국의 독도정책은 국민감정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여기에 언론의 본말전도가 가세하였다. 이제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MBC-TV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안전한가?”라는 선동적 왜곡방송의 정체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PD수첩의 제작진은 선동은커녕 왜곡도 아니며, 단지 오역과 관행이 ‘우연히’ 한 프로그램에 몰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의도적 왜곡인지 우연인지를 가릴 수 있는 취재자료의 원본공개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이유는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의 기본 임무는 객관적 사실을 보도하고, 진실이 감추어져 있으면 드러내어 ‘밝히는’ 데에 있지 ‘덮어두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른바 탐사보도의 전형인 PD 수첩은 정부나 기업, 사회단체 혹은 개인이 진실을 은폐할 때 어떻게 관련 자료의 공개를 요구할 수 있을까? 여기서 언론 본연의 임무와 관련하여 본말전도가 일어나고 있다. 즉 언론의 자유는 언론기관이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힌다는, 혹은 밝히려고 하였다는 것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그런 기관은 언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론의 자유와 언론의 책임간의 균형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언론기관, 보도기관의 ‘의미’와 ‘정의(定義)’에 관한 문제다.

그렇다면 의견의 발표와 비판이 자유로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왜 이런 본말전도가 일어나는 것일까? 또 왜 이런 본말전도가 알려지더라도 고쳐지지 않을까?

II. 대중의 영향력

위의 몇몇 예들을 살펴 볼 때 눈에 들어오는 점은 한국사회의 본말전도의 병폐에 대중사회의 병폐가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 대중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본말이 전도된 상황에 대중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권력에 대한 비판이 항상 요구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대중으로부터 권력이 생기고, 대중의 동의가 권력행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대 대중사회에서 대중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은 명백하다.

우선 광우병 사태를 살펴보자. 촛불시위를 통해 확인된 다수 국민들의 의견이 정부와 언론, 시민단체와 전문가 집단의 행동방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명박 정부는 이 다수 대중들 앞에서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객관적 사실도, 법집행의 엄정성도 모두 포기했다. 또 광우병의 실체를 알고 있는 다수의 지식인 집단도 이 대중의 포효 앞에 입을 다물었다. PD수첩의 MBC도 검찰의 소환을 거부하고 있는 KBS 정연주 사장도 모두 이 대중 뒤에 숨어 자신들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정당들의 행태였다. 야당인 민주당은 촛불시위가 장기화되고 규모가 점점 더 확대되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되자 불법시위를 쫓아다니는 것은 물론, 불법시위 현장에서 가축법 개정 서명운동을 받음으로써 입법과 불법을 하나의 행위로 통합하였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촛불시위의 초기에는 PD수첩의 선동성을 지적하다 그 규모가 커지고 이른바 축제적 성격이 강조되자, 어떤 정치인의 입을 빌어 “촛불집회가 세계 정치문화에 일점 획을 긋는 계기”라고 대중에게 영합했다.

심지어 민주당 대표는 이번 촛불시위의 추동지역의 하나인 daum의 토론장 ‘아고라’의 카페지기를 만나 동지의 우애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음 선거를 생각하는 정치인의 머릿속에는 “국민의 어느 한 표도 동일하다”는 과거의 정적 개념을 넘어서서, 어떤 대중세력에게 영합하는 것이 표를 불릴 수 있는지를 재빠르게 판단하는 현대의 동적 개념이 자리잡은 것임에 틀림없다. ‘묻지마’ 펀드 투자와 다를 바가 없다.

대북정책 역시 ‘국민여론에 맞추어 투명하게 시행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그 근본은 대중의 눈치 보기이다. 햇볕정책 지지자들은 지난 10년간 북한에 현금과 물자를 지원하면서 남북교류를 확대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남북교류의 대부분은 바로 북한에 굴신하면서라도 현금과 물자를 바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은 “남북관계의 확대”라는 명목상의 긍정적 표현에 익숙하여, 대북정책의 본말을 바로잡으려고 할 때 북한이 보이는 조폭과 같은 행태에 불안해 한다. 따라서 “남북관계의 경색”은 민주당이 아니라 현 정부와 한나라당이 더 싫어하는 표현이 되었다.

물론 금강산 피살사건처럼 국민들 대부분이 분노하여, 정부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것도 일종의 국민여론에 맞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대중의 영향력은 모든 개인이 1표의 투표권을 갖고 있다고 해서 동일한 것이 아니다. 온-오프라인에서 적극적인 계층과 소극적인 계층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목소리 큰 자와 악착같이 움직이는 자”의 영향력이 훨씬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부, 정당, 언론, 지식인층으로 하여금 본말전도의 행동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는 대중의 힘은 과연 무엇일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