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핵개발 총사령관으로 자처했다”

위성을 통해 촬영한 영변 핵시설 일부지역 © 연합

[북한 핵시설 근무자 3인 증언]

분강 핵시설 등 북한 핵관련 공장에서 근무한 3인의 증언을 들어본다.

① “김정일, 핵개발 총사령관으로 자처했다”

김대호 / 前 북한 원자력공업부 남천화학연합기업소 우라늄 폐기물처리직장 1작업반장

김일성은 1960대 들어서면서 영변 분강지구에 핵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하여 1962년엔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또 영변 핵단지 안에 핵물리대학을 설립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도 핵물리학부를 설치하여 전문인력을 키워냈다.

1980년대에 들어 북한의 핵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82년에 제대한 인민군 제대군인들과 전국 전문학교들에서 졸업생들을 모집하여 핵단지 내의 생산인력을 대폭 증강하였다.

1984년 10월 김정일은 전방부대들인 1군단, 2군단, 5군단들에서 단련되고 우수한 사관들로 모집하여 핵개발 부대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에 의해 2개 연대가 조직되었고 황해북도 평산 지방에서 우라늄광산 확장공사와 우라늄 생산공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1985년에 이르러서는 중앙당 직속으로 131 지도국 산하 핵개발 부대들을 조직하였다. 중앙당 직속으로 군대를 두고 직접 지휘한 것은 유일무이하게 핵개발부대뿐이었다. 김정일은 ‘핵 개발부대는 나의 친위대’라고 신임을 주었고, 자신은 ‘핵개발의 총사령관’으로 자처하였다. 핵개발부대 군인들은 당의 직속으로 소속된 군대는 자기들뿐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다.

131 지도국은 41여단, 42여단, 43여단, 47여단, 48여단, 49여단 등의 여단들로 되어 있었고 부흥무역회사까지 갖추고 있었다. 43여단은 영변 핵단지 내에 지상 및 지하 핵시설을 건설하였고, 47여단은 황해도 평산지방에 대 우라늄 생산공장을 건설했다. 49여단은 1985년 평안북도 대관군 금창리 일대로 파견되어 지하 핵시설을 건설했고, 일부는 황해북도 평산으로 파견되어 우라늄 광산을 개발했다.

41여단, 42여단, 48여단은 핵개발에 필요한 설비들을 제작하는 부대들인데, 최근 42여단과 48여단이 없어지고 620여단이 새로 생겨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5년 8월 5일엔 전선군단 출신의 핵개발부대에서 3백여 명의 군인들을 제대시켜 2백여 명은 핵연료봉 공장에, 107명은 우라늄 생산공장에 배치시켰다. 나머지 군인들은 중앙당 직속 부대들인 43여단, 47여단, 49여단에 군관 및 사관으로 편입되었다.

1986년에 이르러 영변 핵단지에서 첫 시험 원자로 가동에 성공하였다. 그해 12월 김일성은 핵연료봉 재처리 시설을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전국 전문대학 졸업생들을 모집하여 ‘12월 기업소’가 생겨나게 되었다.

1987년엔 폐연료봉 재처리실험(플루토늄 추출실험) 과정에 생기는 맹독성 가스와 방사능 피해로 관련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쓰러져 평양시 봉화진료소(최고위층 전용병원)에 후송되어 3개월간 치료를 받았으나 모두 식물인간이 되었다.

북한은 영변 핵단지를 ‘분강지구’라고 하며 ‘5기계공업총국’이라고 명명했다. 실제 북한 정무원 산하 기관명에는 ‘5기계공업총국’이 빠져있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분강지구 행정 주소는 ‘평양시 중구역 충성동’으로 되어있다.

1987년에 북한의 핵개발이 실험적 단계에서 공업화로 이행하며 원자력위원회는 원자력공업부로 명칭이 바뀌었고, ‘5기계공업총국’은 원자력공업부와 분리되어 중앙당 직속으로 되었다.

1989년 초, 북한은 무기급 핵물질 개발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관련분야의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를 통해 알렸다. 당시 김정일은 그 무기급 핵물질 개발의 성공에 대만족하여 관련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라고 하며 일본에서 수입된 도시바 텔레비전을 선물하였고, 간접 분야의 우수 간부들에게는 국내산 대동강 상표의 텔레비전을 선물하였다(나는 대동강 TV를 받았다).

1990년 6월 21일, 황해북도 평산 지구에 대규모 우라늄 생산기지인 남천연합기업소 화학공장이 20만톤 처리능력으로 조업하였다.

1991년 9월, 47여단에서 1개 대대를 선발하여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에 핵미사일 기지건설에 파견했다. 그해 군사건설국이 건설한 미사일 기지에서 첫 발사시험이 있었고, 그후 군사건설국이 철수한 후 핵개발 부대인 3공병국 47여단에서 1개 대대를 파견했다.

1992년 5월, IAEA 한스 블릭스 총장 일행이 북한의 핵단지를 방문하기 여러 달 전 이미 북한 지도부는 핵사찰 수용을 결정하고 막대한 양의 납판을 동원하여 영변 핵단지내 지하 핵시설을 덮어 은폐하였다. 내가 근무한 남천연합기업소가 보유하고 있던 납판도 깡그리 털어 보냈다.

영변 핵단지내 지하 핵시설을 은폐하려면 우라늄 방사선을 차단할 수 있는 납판이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 필자 약력

-1959년 4월 9일생(함경남도 단천시 광천동)
-1984년 10월, 5군단 25사에서 중대 사관장으로 근무하던 중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핵 개발부대로 소환되어 황해북도 평산지방에서 우라늄 생산공장 건설에 참가.
-1985년 8월 5일, 제대후 영변 핵단지 우라늄 생산 공장에 배치. 기동 예술선전대 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하며 핵개발에 관한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사상과 의도를 선전.
-1987년 9월, 원자력 공업부 남천 화학연합기업소로 소환(황해북도 평산지방)되어 우라늄 폐기물처리 직장 1작업반장 겸 부문당 비서.
-1989년 10월, 우라늄 폐기물처리 직장 부직장장(부사장) 겸 간부관리 당세포 비서.
-1992년 6월, 710호(핵 개발자금) 확보를 위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외화벌이 상무 겸 서해지구 수산 외화벌이 채취대 대장으로 활동.
-1994년 4월, 북경주재 한국 대사관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입국.

※ 다음 두 건의 글은 본지 한영진 기자(평양출생 2002년 입국)가 북한에 있을 당시 영변 분강지구 핵시설에 근무한 친구 2명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② “한밤중 핵시설 이동, 외국사찰단 깜쪽같이 속았다”

김선명(가명) / 영변 분강원자력발전소 연구사(93년 당시)

내가 1993년 북한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1993년 3월 12일로 기억한다. 신문과 방송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핵무기 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한다’는 성명이 발표되고 주위는 시끌벅적했다. 북한당국은 큰소리를 쳤지만 내심 몹시 불안해했다.

원자력발전소 공장당위원회와 행정부는 갑자기 군사체계로 개편되었다. 당비서는 정치위원, 지배인은 연대장, 기사장은 참모장이 되었다. 당비서는 “지금 미국놈들이 2백대의 비행기를 띄워 영변 핵발전소를 폭파하겠다고 선언했다”면서 “만약 미제가 덤벼든다면 필사의 각오로 총과 폭탄이 되여 결판을 내야한다”고 역설했다.

전국의 군대들은 일제히 전시(戰時)근무상태로 들어가고 진지를 구축하고 방공호에서 날식(군용 쌀가루와 통조림 등)하며 “이번에 전쟁이 일어나면 끝장을 본다”며 야단들이었다. 안전기관과 보위기관은 오토바이에 기관총을 장착하고 누런 탄띠를 물린 채 거리를 누볐다. 보위부는 “정세가 준엄할 때 반동분자들의 준동한다”며 정보활동을 강화했다. 보위부 요원들은 무기배낭을 메고 출근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고산지대를 장악하고 반동분자 숙청과 게릴라들을 토벌한다는 전시전투명령을 하달받은 상태였다.

3월 중순경 특수부대 ‘4.25 저격’과 ‘12저격’ 등 3개 여단이 야간행군으로 영변(평북)의 약산과 공장, 주민지대에 대한 보위를 맡는다며 대거 밀려들었다,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밤 9시경, 근무하던 직장에 비상이 걸렸다. 황급히 숙소에서 뛰쳐나온 우리는 공장 마당으로 몰려들었다. 당장 전쟁이라도 난 듯했다. 군사령관과 대동한 당비서는 “지금부터 군인동무들과 협동하여 공장설비들을 소개(疏開)시켜야 한다”고 전투명령을 하달했다. 각자 직장으로 돌아가 신속하게 핵관련 설비들을 해체하라는 것이다.

나는 지하에 있는 근무현장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공구들을 챙겨서 마광기(摩鑛機) 본체와 부분품들, 보조시설들을 따로따로 해체했다. 높이 3.5m 너비 4m의 입구에는 자동차가 들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기본설비들의 핵심만을 따로 분리하여 천정 기중기를 이용해 바깥으로 옮겨놓고 외부 기중기가 하나씩 집어서 15톤급 일본제 군용수송차 ‘미쯔비시’에 옮겨 실었다. 군용차량은 30대가 넘었는데 모두 미사일 견인차량 같았다. 부피가 큰 설비들이어서 한 트럭에 1-2개 실으면 더 실을 수 없었다.

지휘부에서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핵사찰 탐지기에 걸리지 않을 보조시설들은 그대로 땅에 묻고 날이 새기 전에 기본 설비들을 실은 자동차들을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설비를 실은 차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밤 9시부터 진행된 해체작업은 새벽 3시에 끝났다. 우리는 남아 마무리작업을 했다.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보아도 알 수 없도록 직장입구에 연판을 덮고, 그 다음 흙으로 덮었다. 그 위에 잔디를 씌었다. 그리고 외부로 연결됐던 기중기 레일을 뽑아 흔적도 없이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우리 직장은 하루아침에 온데간데 없어졌다.

훗날 분강에 동원되었던 동무(인민군 12저격 공수 특전대 복무)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그때 핵관련 설비를 실은 차량들은 태천군과 대관군 사이에 위치한 비밀갱도로 옮겨졌다고 했다.

설비를 다 옮긴 후 직장의 규율도 느슨해졌다. 석 달이 지난 후 북한이 다시 NPT에 복귀한다는 소리도 나오고 ‘핵 사찰단’이라는 서양 사람들 여럿이 나타났다. 그 사람들은 핵 탐지기를 메고 핵관련 실물을 찾느라고 몇 달째 돌아다녔다.

우리는 그들을 ‘눈뜬 장님’이라고 놀려댔다. 6월의 봄을 맞은 우리 직장 지붕 위에는 파란 잔디가 돋아나고 있었다.

③ “핵시설 노동자, 방사능 방지복도 없다”

김한철(가명) / 분강원자력발전소 근무(93년 당시)

평안북도 영변군 분강에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영변 약산 동대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구룡강이 약산동대를 돌아 흐른다. 구룡강 너머로 분강 원자력발전소 핵 시설이 있다.

분강으로 통하는 도로는 군인들이 봉쇄하고 있으며, 북한에서는 특수위수구역이다. 분강의 크기는 군(郡)급의 노동자구로서, 공장 노천에는 일반 보조시설들이 있고 중요한 시설들인 원자로, 선별직장(우라늄 정련-변환-농축 등의 작업라인), 재처리 시설은 지하에 들어가 있다.

북한의 원자력공업총국은 원자력발전산업을 담당하는 부서다. 영변 분강원자력발전소는 여기에 소속되어 있다. 외견상 조용한 산업도시처럼 보이는 분강은 전기철조망으로 외부와 격리되어 있으며, 3겹의 검문소를 통해야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정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핵물리연구소가 있고, 연합당위원회와 문화회관, 공장행정 참모부가 자리잡고 있다. 분강에는 갱도전문 공병국 43여단이 주둔해 전문적으로 갱도를 파서 지하 핵시설을 건설한다. 연구는 평양과 박천에 있는 연구소에서 하고, 분강 공장내 연구소에서도 진행한다. 김정일이 1981년 8월 29일에 처음으로 공장을 현지 방문했는데. 분강 공장은 그때를 기념일로 ‘8. 29절’을 지정했다.

원자력발전소의 연구사들은 60년대 구소련에서 유학한 과학자들을 모체로 하고 공장 핵물리대학을 졸업한 사람들과 강계국방대학 졸업생들, 함흥수리대학 졸업생, 김책공업대학 물리학부 학생들로 조직되었다. 현장기사로는 함흥물리단과대학 학생들도 있다.

대부분의 연구사들은 머리가 좋은 엘리트층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빽’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핵발전소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졸업말기에 몸이 아프다며 학교에서 자퇴한다. 방사능 오염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평북 구성시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안 가는 대신 당에서 주는 파견장을 가지고 분강에 갔는데, 알고 보니 원자력발전소였다. 우리 직장(생산라인)은 우라늄 광석을 정제했다. 1988년에 배치되어 갔을 때만도 공급이 괜찮았다. 하루에 식량 800gr이 배급되었고, 작업복과 작업신발은 무상으로 주었다. 다른 직장과 생산경쟁에서 이기면 양복지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당과류는 한 달에 2kg 정도 공급되었고, 구내식당에서는 돼지비계를 먹기 싫도록 주었다. ‘지도자 동지’가 원자력발전소 근무자들에게 ‘비행사 대우’를 해주라는 방침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1~2년 정도 일했는데 머리카락이 자꾸 빠지고 살결은 백인들처럼 하얗고 전신에 맥이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일할 때 작업복만 입고 광석을 날랐는데, 어느날 러시아에서 왔다는 원자력대표단이 시커먼 복면 같은 것을 입고 공장 현장을 둘러보고 쌍안경으로 광석을 관찰하는 것이다.

간부들은 그때 “코 큰놈들은 생에 대한 애착이 강한 놈들이다”고 설명하곤 했다. 북한은 노동자들에게 방사능의 유해성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았고 현장안전시설이 아주 낙후했다. 훗날 들은 바에 의하면 러시아 핵물리연구사들은 연(pb)으로 된 방사선 방지옷을 입고 현미경으로 광석분석과 관찰을 했지만 북한노동자들은 오히려 그런 것을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다. 황해북도 평산군의 우라늄 광석은 순도가 높고 질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고 했다.

우라늄 광석에서 나오는 감마선이 방사선 물질로 세포를 파괴한다는 정도는 노동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들과 공장 간부들은 “잘 먹으면 몸에 방사능 면역이 생겨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다”며 밥 잘 먹고 건강하면 60세까지는 문제없이 산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일년 뒤에 집에 휴가 갔는데 어머니가 피 마르는 병(백혈병)에 걸렸다고 눈물을 흘리며 직장을 그만두라고 난리를 쳤다.

분강의 원자력발전소는 경수로 시스템이 아닌 흑연감소로다. 우라늄을 농축시켜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분열 반응을 일으켜 전기를 생산하는 구식체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전기를 생산한다고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통제구역으로 선포하고 가동했지만, 전기는 1kw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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