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한반도 주변정세 주도권 잡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 호응해 옴에 따라 북한이 주도적으로 한반도 정세를 이끌어 가려는 의지를 본격화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주역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도 “정부의 발표를 보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결단해서 적극적으로 나온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한반도 정세는 올해 초 북.미 베를린 회동을 시작으로 6자회담에서 ‘2.13합의’가 이뤄지고 6자회담을 짓눌러온 방코 델타 아시아(BDA) 문제가 풀리면서 북한의 적극적인 자세 속에서 해빙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과 관계가 부시 행정부 출범이래 어느 때보다 화해를 지향하고 있고, 북한의 전통 우방인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도 경제협력을 축으로 급속도로 호전되는 등 북한은 일본을 제외한 한반도 주변 당사국들과의 관계 복원 또는 진전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북한의 이러한 변화는 물론 능동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라 미국, 중국, 러시아 측이 대내외 필요성에 따라 대북 접근에 나선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북한과 일본간 관계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 한때 미국이 일본에 속도조절을 주문할 정도로 접근했었으나 현재는 강경 대립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이런 가운데 남북정상회담 개최는 북한이 일본에 대해 취하고 있는 ‘왕따전략’을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대미관계 진전 = 대미관계 호전은 잔뜩 웅크린 자세였던 북한이 다시 활개를 펴고 자신에 찬 대외행보를 하게 된 원동력이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의 무시전략과 강경정책에 맞서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실시로 대응하다 중간선거 패배를 계기로 실용주의적인 대북 외교로 전환한 미국과 새로운 관계를 적극 모색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BDA 해결 과정에서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을 동원하고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방북을 허용한 미국의 달라진 모습에 ‘지금이 기회다’는 판단을 내렸을 개연성이 있다.

북한은 2000년에도 당시 김대중 정부가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를 설득해 ‘포괄적 접근’에 기초한 페리 보고서를 내놓고 관계 정상화에 적극 나서도록 하면서 남북정상회담에 응하는 등 대외적으로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지난 2월 6자회담에서 핵시설 불능화 조치가 이뤄지면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및 대적성국 교역금지 적용을 해제하겠다는 언질을 줌으로써, 북한이 불량국가 이미지를 벗고 국제사회로 편입하는 발걸음을 가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미국은 이에 더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다자안보 협력체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함으로써 북한으로서는 옛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급변 후 늘 느껴온 안보위협을 털어낼 수 있는 계기도 생긴 셈이다.

임동원 전 장관은 “북한이 핵문제에 대한 전략적 결단을 확실히 내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해 핵카드를 포기하겠다는 전제를 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대중.러 관계 복원 = 냉전체제 속에 이뤄졌던 북한-중국-러시아의 북방 3각동맹은 옛 소련의 몰락과 한.중 수교를 계기로 흔적만 남게 됐지만, 최근 복구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중, 북.러간 틈메우기는 2000년 들자마자 시작됐다.

김정일 위원장이 2000년 5월 중국을 비공식 방문한 데 이어 2001년 1월 다시 비공식 방문하고, 2001년 9월에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북한을 방문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0년 7월 북한을 방문하고 2001년 7월엔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했었다.

북.중관계는 작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중국의 대북 제재결의 찬성으로 인해 다시 매우 불편한 관계로 다시 악화해 이때의 상호불신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문제가 ‘2.13합의’로 가닥을 잡으면서 북.미관계가 발빠르게 전개되자 중국은 신속히 대북 접근에 나서 균형잡기 노력을 시작하고 있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중국은 북미관계가 급진전되는 것에 상당한 초조감이 있다”며, 북중관계의 개선은 중국 정부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양제츠 외교부장이 북한을 방문해 김영일 내각 총리를 만나 ▲정부 주도의 경제협력 ▲민간의 경협 참가 ▲시장경제원리 적용이라는 북중경협 3대 원칙을 분명히 했을 때, 자칫 미국으로 기울어질 수 있는 한반도 정세의 균형추를 맞추려는 작업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북중간 무역규모가 매년 급성장하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경제협력을 축으로 북중관계가 더욱 긴밀해질 전망이다.

2001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방북 이후 복원된 북러관계는 큰 진전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꾸준한 관계를 이어왔다.

러시아는 북한의 핵실험 후 대북제재 결의에 찬성했으나 BDA 자금의 송금과정에서 중앙은행을 개입시켜 북한을 지원함으로써 북러관계는 상승세를 타고 있다.

특히 북한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 사할린 지역과 석유가스.농업.건설.보건.목재가공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남북관계 업그레이드 =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남쪽에서 그동안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제안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북한이 이 제안을 수용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북한이 한반도 정세의 흐름을 자신들의 호흡에 맞춰 끌고가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이 남북관계에서 그동안 개최 자체에 부정적이었던 장성급 회담에 적극성을 보인 것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이에 따라 김 위원장은 비핵화 문제가 가닥을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관심이 한반도 평화문제에 집중되는 것을 포착,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국제외교의 중심에 있음을 과시하는 한편 ‘평화 의제’로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한미합동군사연습 등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 문제를 제기해 북한의 안보환경을 개선하려 한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지속적인 대미관계 개선을 위해선 핵문제에서 진전이 있어야 하는데, 북한으로선 궁극적으론 핵포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하더라도 핵포기에 앞서 자신들을 위한 안보상황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때문에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NLL이나 한미군사훈련 범주를 벗어나 주한미군 문제를 비롯해 남북간 전반적인 군비통제 문제에 관해 선수를 치고 나올지도 주목된다. 북한은 최근 남한의 이지스 구축함 진수 등 군사력 증강에 예민한 반응을 보여왔다.

사실 북한은 ‘남한은 미국이 하는 대로 따라한다’는 대남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2.13합의 이후 북미관계가 긍정적으로 진전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단순히 경제지원을 받기 위한 목적이라면 굳이 남북정상회담 카드를 꺼내들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자신들이 느끼는 ‘군사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또 이를 통해 핵문제를 진전시켜 대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지름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NLL이나 한미합동 군사훈련과 연습 등은 남한 홀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 미국과 함께 논의해야 할 일이라는 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에서 예상되는 김 위원장의 군사현안 제기는 미국을 동시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북한은 핵실험 이후 ‘이제는 경제강국 건설’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는 만큼, 당연히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남측으로부터 대규모 경제협력도 기대할 것이다.

◇일본 길들이기 = 북한은 일본에 대해서만은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북일관계 개선을 위해 납치문제를 시인하고 일부 납치자를 일본으로 돌려보내는 등 ‘통 큰’ 결단을 했음에도 일본은 납치문제를 이유로 대북 적대시 정책을 이어가고 조총련까지 붕괴시키려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 위원장은 일본을 제외한 모든 주변국과 관계개선을 통해 일본을 ‘왕따’시킨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북일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남북정상회담 개최는 일본 정부에 적잖은 정치적 부담을 안길 것으로 보인다.

김근식 교수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제일 당혹스러울 나라는 일본”이라며 “회담을 반대할 수는 없는데 한반도 정세에서 소외되는 게 아니냐 하는 우려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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