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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등이 보도한 북한의 ‘전시사업세칙’이 화제다. 2쪽 분량의 지시문건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지시 제002호’와 이에 따른 본문인 31쪽 분량의 ‘전시사업세칙’은 전쟁 발발시 북한의 대응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내용이 ‘외부의 침공시 북한의 방어와 재반격’만을 담고 있어 일각에서는 의도적으로 유출된 문건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구랍 25일 <평양방송>은 ‘전쟁머슴꾼들의 자주국방타령’이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김정일의 발언이라며 “우리나라(북한)에 실지로 존재하는 것은 남침위협이 아니라 북침위협이다”라고 주장했다. 내용을 살펴보면 남한의 이른바 ‘협력적 자주국방’ 정책을 비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나, 여하튼 침공을 우려할 측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북한은 예로부터 이런 주장을 해왔으나, 특별히 그것을 ‘김정일의 발언’이라는 절대적 권위를 빌어 이야기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눈길을 끌었다.
북한의 복합 이미지 전략
최근 북한의 일련의 공식적 발언을 보면 엄살이 부쩍 들었다. 흔히들 북한의 협상전술을 ‘벼랑끝 전술’이라고 한다. 우리는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최대한 버팀으로써, 그런 극한의 상황을 원치 않는 상대의 양보를 유도하는 전략이다. 이른바 ‘치킨게임’이다. 북한이 정말로 ‘끝까지 갈’ 생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것을 ‘허풍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1993-94년 핵위기때 북한은 이런 전술의 전형을 보여줬으며 ‘제네바합의’라는 짭잘한 수입을 얻었다.
그러나 북한은 허풍만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허풍과 함께 엄살을 적절히 가미함으로써 일정한 ‘북한 이미지’를 창출해낸다. 우선 북한이 김일성의 말이라며 선전하는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라는 말처럼, 애초에 북한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이 침략적 전쟁을 도발한다면 당당히 맞설 의지가 충분한 ▲작지만 강한 나라 ▲뚝심과 자존심, 배짱으로 사는 나라라는 ‘멋쟁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간간히 엄살을 부림으로써 ▲제국주의자들의 항시적 침공위협에 시달리는 나라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의연하고 솔직 담백하게 살아가는 나라라는 ‘청순가련형 이미지’를 추가한다. 이쯤되면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우는’ 국가판(版) ‘들장미 소녀 캔디’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복합 이미지 전략은 북한정권에 우호적인 사람들이나, 늘 북한을 괴롭히는 캐릭터로 형상화된 미국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잘 먹히고 있다. 특히 민족주의 정서가 강한 일부 남한 사람들에게는 ‘다른 건 몰라도 북한이 이런 건 낫지 않느냐’거나 ‘북한의 이런 점은 이해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식의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허풍은 북한이 공격적으로 치고 나가는 전술이고, 엄살은 살짝 뒤로 빠지는 전술이다. 이렇게 치고 빠지는 전술 때문에 일본의 대표적 친북학자인 와다 하루끼(和田春樹)는 북한을 ‘유격대 국가’라고 표현한 바 있다. 만주에서 빨치산을 할 때부터 익혔던 유격대식 활동방식을 국가운영에도 그대로 도입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소수의 항일무장부대가 일본 관동군을 괴롭히며 유격전을 벌였다면 이제는 북한이라는 국가 자체가 빨치산이 되어 제국주의자들의 포위망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참으로 하루끼다운 발상이다.
누구를 위한 허풍과 엄살인가
아무렴 좋다. 북한의 ‘치고 빠지는’ 전술을 멋있다고 하자. 그런데 생각해볼 점은 대체 누구를 위해서 치고 빠지냐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액션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단한 전술이다’ ‘기가 막히다’고 외형적 모습에 감탄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인민들의 삶에 주목해야 한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포장해주는 북한정권의 유격대 전술, 빨치산 전술, 벼랑끝 전술, 허풍과 엄살의 전술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인민들을 배불리 먹여 살리고, 자유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것인가. 답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쓰러져 가는 독재정권을 어떻게든 연명하려는 전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Daily NK는 이번에 청진시 꽃제비 동영상을 소개하였다. 참혹한 현실은 우리의 눈을 질끈 감게 한다. 넋나간 사람들이 ‘거 참 멋진 놈들이네’라며 북한정권의 기묘한(?) 전술에 감탄하는 사이, 북한정권의 허풍에 움찔하고 엄살에 동정하는 사이, 지난 10여 년간 북한 인민들은 이런 아비규환의 생지옥에서 고생하고 있다. 이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
올해 북한의 신년공동사설은 전반적으로 ‘맥이 빠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방 60주년, 조선노동당 창건 60주년 등 이른바 ‘꺾어지는’ 해의 사설에 걸맞지 않게 어조가 무기력하다. 정말 기가 약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올해에는 엄살 전술을 더욱 강화할 조짐으로 보인다. 북한에 대한 동정여론이 급증할 것이다. 그러나 동정해야 할 대상은 북한정권이 아니라 북한인민이다. 동정해야 할 대상을 동정하지 않고 분노해야 할 대상을 동정하며 급기야 야합하는 반역(反逆)이 금년에는 계속되지 않아야 한다.
곽대중 논설위원 big@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