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이후’ 통일문제가 궁금합니까?

최근 남한사회는 통일에 대한 공포감이 있는 것 같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독일의 경험을 분석해온 남한 학자, 정치가들은 흡수통일을 바람직한 시나리오로 생각하지 않고 점진적이며 단계적인 통일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

최근 이러한 견해는 더 확대되고 있다. 김규완 교수와 박성조 교수가 쓴 ‘남과 북 뭉치면 죽는다’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것은 이러한 경향을 입증한다.

통일공포증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독일에서 볼 수 있듯 사회주의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것은 힘들고 힘든 일이다. 이미 잘 살게 된 지 15년~20년이 되는 한국사람들이 풍족한 생활을 희생시킬 의지가 없다는 것도 자연스럽다.

남한체제로의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친북세력도 있다. 북한에 환상을 가지면서 시대에 뒤쳐진 생각을 하고 있는 그들은 ‘미국의 압력’이 없어지면 북한은 빠른 속도로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북한주민들의 고생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통일을 미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북한에 환상이 없는 사람들도 물론 적지 않다. 이들은 북한이 민주화를 이룩할 경우에도 남과 북이 2개의 분단국가로 공동 생존할 수 있다고 보고, 남북격차가 점차 줄어들어 나중에 통일이 별 문제 없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본다.

남한사회의 북한에 대한 시각

그런데 의문은 민주화된 북한이 과연 분단국가로 생존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미래를 자신있게 예견할 용감함은 없다. 그러나 현 한반도의 상황을 보면 북한이 오랫동안 민주주의 분단국가로 생존할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 북한이 민주화 이후에 오랫동안 분단국가로 생존하지 못하는 이유는, 북한 주민들의 정치 의지와 요구 때문이다. 북한은 간부들만 사는 나라가 아니다. 지금은 북한 주민들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지만 북한에 민주주의가 도입되면 주민들의 목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문제는 북한 주민들이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상태를 바람직하게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좌파 학자들은 남한사회를 분석하면서 남한사회에 ‘지배층’도 있고 ‘민중’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에 모순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북한에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는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본다. 그들에게 ‘북한’은 곧 김정일과 그의 측근들이다.

한국의 이른바 ‘진보’ 학자들은 남한사회에 대해서는 사회학적 분석을 중요시하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이러한 접근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벤츠를 타는 당중앙 일꾼과 배가 고픈 함흥의 학교 교원,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를 수용소 정치범, 그리고 경찰을 피해 암시장에서 엄청난 돈을 버는 밀수출입 업자가 같은 의식을 갖고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좌파 학자 대부분이 자신의 정치적 경향성 때문에 북한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우파 학자들도 이상하게 비슷한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들도 북한에 여러 계층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거나, 아니면 여러 계층의 독립적인 역할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김정일 이후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북한에 민주주의 체제가 생기면 그동안 잔인한 억압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던 각종 사회적 모순이 노출될 것이다. 물론 간부계층은 남북이 그대로 분단국가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1960년대 이후 북한의 간부계층은 행정경험과 고급교육에 대한 독점을 거의 세습적인 특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김정일 이후에도 분단을 유지하면 북한 권력 엘리트층은 김부자 시기 간부로 지낸 사람이나 그 가족들로 구성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북한에서 영어를 할 줄 알고 컴퓨터를 하고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간부가 아니면 간부들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이 통일할 경우에 간부계층은 극심한 생존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그들은 남한자본과 경험, 기술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통일 한반도 이북지역에 대한 통제를 유지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범죄와 인권 침해, 그리고 양민학살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범죄에 책임이 있는 자들 모두가 처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통일될 경우에 북한 간부들이 특권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은 확실하다. 그들이 무섭게 생각하는 것은 김정일 체제 붕괴보다는 ‘통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김정일 이후에도 북한에 어떤 권위주의 체제가 들어설 경우, 정권을 장악한 옛 노동당 간부 출신들은 통일을 연기하기 위해 비슷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외국세력과 타협을 시도할 수 있다. 경제적인 부담을 피하자는 서울도, 북한 땅을 전략적 공간으로 보는 베이징도, 이러한 타협에 관심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김정일 시대 종말 이후에 일반주민들의 의지와 목소리를 압박할 수 있는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면 분단국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구소련, 독일과 한반도 경우

그러나 북한에 민주주의 제도가 등장하면 어떻게 될까?

민주주의는 주민들이 정치에 영향을 주는 정치제도다. 물론 이 영향력을 과대 평가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권력엘리트는 다양한 직간접적 수단으로 사회적 응집을 유지할 수 있지만 국민들의 압력이 너무 크면 양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통일문제는 바로 주민, 즉 민중이 압력을 많이 넣을 수 있는 문제다.

북한도 민주국가가 되면 북한 주민들은 남한매체에 접근도 되고 남한사람들과 별 문제 없이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평양 인민학습당 옆에서 조선일보를 살 수도 있고, 자기 집에서 KBS연속극을 마음대로 볼 수도 있고, 경주나 부산에 사는 친척들을 찾아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민주주의 효과로 남한의 진실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널리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남한에 대한 지식은 북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것이다. 지금도 북한 사람들이 남한이 북한보다 잘 산다는 사실을 점차 알아가고 있지만, 그 격차가 얼마 큰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 차이가 너무 크다.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은 그냥 부자 나라가 아니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사는 나라다.

북한의 1인당 생산액은 남한보다 15배가 낮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1960-70년대의 경험에 비춰보면 서양의 학자들이나 기관에서 공산권 국가의 경제규모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점을 고려하면 남북 격차가 더 클지 모른다.

북한 주민들이 남한 생활상에 대한 진실을 알게될 경우, 흡수통일이 되면 자신들도 남한과 같은 생활수준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될 것이다.

소련붕괴의 경험도 이와 비슷하다. 1980년대 말 구소련 사람 대부분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나자 미국과 꼭 같은 생활 수준을 쉽게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근거가 없는 환상이었다. 그래도 이 환상이 소련체제 붕괴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1980년대 말 소련과 미국의 격차는 현재 남북한 격차만큼 심하지 않았다. 또 미국과 소련은 같은 땅도 아니고 같은 민족도 아니었다. 이 두 가지의 특성을 고려하면 북한 주민들이 갖게 될 환상은 훨씬 더 클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말하는 ‘환상’이라는 의미는 북한도 짧은 기간 동안 남한과 같은 소득수준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뜻한다. 북한이 지금의 남한 경제나 사회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20년-40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흡수통일의 경우, 북한 사람들의 절대적 생활수준이 지금보다 대폭 향상될 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다.

북한 민중이 통일을 통해 자신의 생활수준이 많이 향상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들의 요구를 막을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그들이 계속 분단국가에서 살도록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통일 공포증에 빠진 서울이 “우리는 서울 부동산 시장을 보장해야 하는데, 너희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 국민으로 받을 수 없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별로 없을 것이다.

급속한 민주화, 北 장기생존 불가능

최근 남한정부나 남한사람들이 흡수통일을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주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민주주의 정부가 즉각적 통일을 요구한다면, 서울의 정치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독일에서 동독과 서독이 서로 주권국가로 인정했지만 동독체제가 무너지자 흡수통일이 됐다.

북한에서 어떤 권위주의적인 체제가 있을 경우 남한은 북한 지배층과 타협할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들의 압력을 반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북한이 권위주의적인 체제 아래에서만 분단국가로 계속 생존할 수 있다고 본다. 풍요롭고 자유롭게 사는 남한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북한의 장기적 생존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통일을 이렇게 무서운 것으로 보아야 할까?

물론 통일은 재정적 부담도 크고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도 장기적으로 말하면 통일은 한국이란 나라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지금 사는 사람들이 통일 때문에 고생할 수도 있지만 통일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다. 통일은 한국의 국력과 저항력을 향상시킬 것이다. 또 통일은 수많은 북한 사람들의 생활을 개선할 것이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 역사학 박사

<필자 약력>
-구소련 레닌그라드 출생(1963)
-레닌그라드 국립대 입학
-김일성종합대 유학(조선어문학과 1986년 졸업)
-레닌그라드대 박사(한국사)
-호주국립대학교 한국사 교수(1996)
-저서 : <북한현대정치사>(1995) <스탈린에서 김일성으로>(From Stalin to Kim Il Sung 2002) <북한의 위기>(Crisis in North Korea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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