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이후’를 꼭 준비해야 하는 이유

지금 김정일 정권 앞에 놓인 길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째,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 10.3 프로세스에 따라 핵 신고를 제대로 하고, 핵무기를 포기하며 좀더 적극적인 개혁개방으로 나가서 궁극적으로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이 되는 길이다. 한반도평화체제, 미북 수교 등으로 북한을 둘러싼 내외적 환경도 획기적으로 바뀐다.

2.13 합의와 영변 핵시설 불능화,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각종 남북경협, 미북관계의 순풍 등으로 2007년 한해 동안 이 길의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사람이 많아졌다.

둘째, 9.19, 2.13 합의를 다시 뒤엎고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9.19 이전으로 유턴하는 길이다. 즉, 국제사회의 제재가 재개되면서 다시 문을 닫아걸고 선군체제를 더 강화하는 것이다.

셋째, 가능성이 낮지만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 개혁개방으로 가는 길이다.

이중 첫째와 셋째는 북한의 ‘개혁개방’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에 비록 시간차는 있겠지만 나중의 결과는 비슷해질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압축하면 1) 핵포기와 개혁개방의 길 2) 핵포기 거부와 현 체제 고수의 길이 남는다.

그러나 근본 문제는 김정일 정권이 이 두 가지 길 중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체제붕괴로 결과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위의 세번째 길인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도 본격적인 개혁개방으로 갈 경우 붕괴를 면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김정일 이후’를 면밀히 대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 미 중 + 일 러, 플랜 짜야

첫번째, ‘핵포기-개혁개방의 길’의 경우는 한국과 주변국은 물론, 무엇보다 북한 주민들에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이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의 특성상 완전한 핵포기도 어렵겠지만, 개혁개방이 성공할 가능성, 즉 중국, 베트남처럼 개혁개방 연착륙의 가능성은 낮은 편인데, 연착륙에 실패할 경우 체제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다.

북한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단행했다. 모기장식 특구형태로 제한적이지만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도 지속되었다.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선언으로 경협 분야가 늘었다. 특히 2002년 7.1 조치는 장마당에 이어 종합시장이 생겨나면서 북한 내부에 주민들이 먹고사는 방식에 적지 않은 변화를 불러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북한의 대내외 정책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그동안 북한이 확실히 개혁개방으로 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외부세계에 주지 못한 근본 이유는, 무엇보다 김정일이 개혁개방에 대한 일관되고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의지가 약하다보니 개혁개방 마스터 플랜이 나올 수도 없다.

지금까지 북한정권이 개혁개방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는 세 번 정도 있었다. 첫번째는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나갈 때 동맹관계로서 같이 개혁개방을 추진할 수 있는 호기(好機)가 있었다. 두번째는 90년 동유럽 체제전환 시기 또는 94년 김일성 사망후 중국의 개혁개방 노하우를 받아들일 기회가 있었다. 중국도 북한에 적극적으로 개혁개방을 권유했다. 세 번째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그해 말 미국과의 미사일 협상이 거의 완료되면서 미국과 관계개선의 급진전을 이룰 수도 있었다. 이 시기 김대중 정부의 도움을 받아 개혁개방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세번의 기회를 모두 거부했다.

2000년 남한 언론사 사장단이 방북하여 북한의 개혁개방 문제를 언급하자 김정일은 “우리는 개방의 종심(縱心)이 짧다”고 간단히 답변한 적이 있다. 이 발언에 ‘북한은 본격적인 개혁개방을 하기 어렵다’ 즉 ‘나는 개혁개방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 숨어 있다(지난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이 끝나고 노무현 대통령이 도라산 보고대회에서 “북한의 개혁개방은 북한이 알아서 할일”이라고 말했는데, 아마도 김정일의 개혁개방에 대한 설명에 노대통령이 반론을 제기할 정도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정상간 대화 때 김정일의 논리에 따라가면서 완전히 압도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즉 김정일 정권이 유지되는 한 북한이 스스로 본격적인 개혁개방으로 나갈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방의 종심이 짧다’는 김정일의 답변은 북한의 사정을 정확하게 본 것이다.

북한은 개성과 여주 또는 신의주, 원산과 청진 등 동서 해안선을 따라 순차 개방을 하더라도 개방의 물결이 내륙으로 이어지는 데는 불과 몇 년이 걸리지 않는다(이 때문에 금강산, 개성공단, 백두산 식으로 현금확보 위주의 ‘모기장 식’ 제한개방만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본격적인 개방에 성공하려면 김정일이 직접 개방 마스터 플랜과 모든 자본 사용권 등을 틀어쥐고 강력한 권위로 밀고 나가야 한다. 시장경제 확대에 빠른 시간 내에 적응할 수 있는 각종 정책적 개혁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자본과 기술, 인력이 적절하게 배치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경제주체인 국가, 기업, 주민들의 사고방식이 여기에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 말하자면 모든 정책과 타이밍이 아주 잘 맞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방에 따른 주민들의 반작용이 급속하게 확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같은 시나리오는 김정일 자신과 북한 정권, 주민들의 객관적 능력을 감안할 때 도저히 가능하지 않다.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지도를 받는 ‘외부신탁 경제관리’를 상정해볼 수도 있으나 이는 북한이 모든 국가통계를 공개하고 경제정책에서 국제금융기구의 지시를 일일이 받아야 되는데, 김정일 스스로가 ‘장군님 체제’를 버리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다. 또 이런 북한에 국제금융기구가 차관을 줄 리도 없다. 결국 북한 내부를 계속 단속하면서 철조망 특구 형태로 지극히 천천히 가는 ‘모기장식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북한내부 사정은 김정일의 ‘모기장 전략’으로 북한 내부의 ‘안정적 관리’가 지속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지난 10여 년 동안 북한주민들의 의식은 그 이전에 비해 정말로 많이 바뀌었다. 물론 1~2년내 당장 큰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정치, 경제, 사회문화, 대외관계에서 지금 북한은 ‘정상상태’인 분야가 하나도 없다. 사회주의 내부 시스템에서 보아도 비정상 상태가 너무 오래 되었고, 외부 관점에서 보면 더욱 기이한 비정상일 뿐이다. 특히 지금까지 북한사회를 결정적으로 지탱해온 ‘수령에 대한 절대적 권위’가 지금 김정일에 대해서는 많이 깨져나가고 있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내부단속을 위해 최근 1년 내 7건의 공개총살을 집행하도록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방이 되면 될수록, 즉 외부 정보가 유입되면 될수록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60년간 누적돼온 온갖 악행이 계속 드러나게 된다. 김정일 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개방의 물결과 사회 변화, 그리고 주민들간 의사소통의 확대(휴대폰, 전화 등)가 진행될수록 김정일 정권의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핵포기-개혁개방의 길’은 한국과 주변국이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주도면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한국이 북한 개혁개방의 종합 마스터 플랜을 먼저 만들어 미국, 일본과 협의한 뒤, 한미일이 중국, 러시아의 동의를 받아내는 것이 올바른 경로일 것이다. 또 6자회담이 지속되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이 길만이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 안정, 북한주민의 삶과 인권을 개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김정일이 궁극적으로 핵포기-개혁개방의 길로 간다면(물론 그럴 가능성은 낮다) 중국, 베트남과 같은 개혁개방 연착륙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한국과 주변국이 능동적 북한 개혁개방 플랜에 먼저 나서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 경우인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의 개혁개방’도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김정일 체제의 붕괴를 불러 올 것이라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다만 이 경우에는 핵무기, 핵물질의 대외 유출을 막기 위한 대비를 철저히 세워야 한다.

김정일 절대권위 많이 훼손돼

두 번째, 핵무기 포기를 거부하고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으며 더욱 문을 닫아 걸 경우.

이 경우, 김정일 정권이 생존하려면 ▶확고한 군부 장악 ▶주민들에 대한 엄격한 통제 ▶외부세계와의 단절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시장통제, 내부 공포감 조성과 감시가 확대될 것이다. 김일성 사망후 98년까지 김정일이 빗장을 닫아걸고 “평양에도 총성을 울려라”(지방뿐 아니라 평양에서도 공개총살을 집행하라)는 식의 공포정치로 내부통제에 들어갔던 시기와 유사한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김정일 정권이 처한 내외적 상황이 94년~97년 시기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당시는 제네바 합의로 미국의 포용정책이 계속되었다. 외부의 대북 지원도 시작되었다. 대외적 조건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을 둘러싼 모든 나라가 북핵 폐기를 바라고 있다. 또 유엔에서는 5년 연속 북한인권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따라서 만약 6자회담에서 북핵 문제가 다시 좌초한다면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대북전략은 압박 모드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또 중국이 북한을 더 이상 도와주기도 어렵다. 이 경우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미국과 협력하며 북한정권 교체를 포함한 ‘포괄적 해결’로 대북정책을 바꾸려 할 것이다.

북한의 내부 사정도 10여년 동안 많이 바뀌었다. 지금 북한은 배급을 받는 당, 군, 국가기관 종사자 등을 제외하고 주민 대다수는 시장에서 장사를 통해 생계를 꾸려간다. 시장을 통한 생계유지가 일정 단계에 올라 있다. 장사로 먹고사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것은 집단 동원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뜻이다.

이같은 조건에서 시장통제와 주민동원체제로 회귀하려면 공개처형 대폭확대 등 훨씬 엄격하고 공포스런 수단이 동원돼야 한다. 그러나 이같은 수단은 단기간 동안은 통할지 모르겠지만 계속 유지되기 어렵다. 이미 지난 10여 년간 중국, 한국 등의 드라마, 영화 CD를 비롯한 외부정보가 많이 들어가 있다. 이 때문에 이를 단속하는 비사회주의 검열단(속칭 ‘비사 그루빠’)이 계속 활동해왔다.

김정일의 절대권위도 과거에 비해 많이 훼손되었다. 주민 몇 명이 모이면 김정일에 대한 험담이 오가고 당과 국가기관의 부패와 무능, 현실을 개탄하는 소리가 나온다. 황해도 시골 아주머니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장군님’을 욕하고 있는 이 현실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명박 정부, ‘북한관리안’ 갖고 있어야

이같은 내외적 환경과 조건을 감안하면 김정일 체제가 과거로 다시 유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시적으로 유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곧 내부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이후에 발생하게 될 내부갈등은 ‘정치 민주화’와 같은 ‘사치스런’ 투쟁이 아니라, 주민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담보하려는 치열한 ‘생존 투쟁’으로 전개될 수 있다. 이제 주민들은 그 끔찍했던 94~98년 대아사의 악몽을 다시는 겪기 싫은 것이다.

이밖에 구소련 말기에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유사한 체제말기형 대형 사고를 비롯하여 군, 보위부, 친위경호부대, 보안성 등 무장(武裝)기관 사이의 우연한 충돌 등도 예상해볼 수 있다. 또 김정일의 건강, 후계자 문제에서 예상되는 ‘궁중 암투’ 등이 북한 내부에 이상현상을 불러올 가능성은 계속 내재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어느 시기에, 어떤 경로로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계획적이고 전략적인 북한 개혁개방을 포함한 ‘능동형 북한관리안’을 만들어두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현 김정일 정권 및 북한사회에 대한 정확한 진단 ▶지난 10년간 대북정책에 대한 냉정한 성찰 ▶현실주의에 기초한 대북전략 수립 ▶한-미-일 협력체계 수립 및 중국, 러시아, 유럽을 포괄하는 북한문제의 국제공조 확대 ▶대북정책 수행에서 민-관협력체계 강화 등에 더욱 집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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