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연구] 정치인 김정일-2 끝없는 감시와 통제

▲ 김일성 90회 생일(2002년 4월 15일)에 즈음해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기념행사에서
시민들이 꽃다발을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북한화보 ‘조선’=chosun.com>

“우리 김정일 위원장님이 비를 맞고 계신다.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연주를 하지 않겠다”. 2001년 4월20일 서울에 온 북한 국립교향악단의 한 단원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하 김정일)의 사진이 있는 포스터가 비를 맞자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1999년 2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 후쿠이(福井)와 시마네(島根) 해안에서 북한군 15명의 사체가 발견됐다. 1998년 11월 북한의 강원도 고성에서 부식을 구하러 출항했다가 폭풍을 만나 변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조난 직전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선실에 있던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를 젖지 않게 하기 위해 상자에 띄워보냈다.(평양방송 보도) 이들은 1999년 3월 북한 최고 상훈인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수백만이 죽어 가는 상황에서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비결’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다. 맹목적인 존경에 북한 주민들이 어릴 때부터 길들여져 온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다. 김정일이 김 주석의 후계자로 내정된 지 2개월 뒤인 1974년 4월에 직접 정리해 발표한 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하여야 한다” 등으로 꽉 차 있다.

이는 북한사회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 전통 가치와 윤리도덕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과 맥이 닿아 있다. 북한사회에는 ‘사회주의 대가정’, ‘충효사상’ 등의 유교적 가치가 자리잡고 있다. 김정일은 90년대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질 때도 효심에 호소했다. “사람이 자기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자기 부모가 반드시 다른 부모들보다 낫거나 어떤 덕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를 낳아 키워준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정일은 전쟁경험이라는 사회적 자원과 전통과 도덕이라는 문화적 자원을 충분히 동원하여 북한 주민을 통제하는 데 활용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열 살도 채 안 돼 어머니를 여의고 전쟁으로 인해 고아 아닌 고아로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김정일은 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배려와 효의 강조가 체제유지에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인지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또한 100세, 90세, 80세 생일을 맞은 어른들에 대해 생일상을 차려주고, 김일성 주석의 사망 후 3년상을 치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당시 숙소로 찾아와 ‘아침인사’를 드리는 등 효심과 도덕성을 활용하는 ‘인덕정치’가 유교전통을 가진 북한사회에 얼마나 뿌리 깊게 접목될 수 있는지를 간파하였을 것이다.

김정일은 또 직접적인 사회통제 장치들을 가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5호담당제란 것이 있었다. 이웃의 비행에 대하여 5가구가 연대책임을 지는 제도다. 1957년 5월 ‘반혁명분자들과의 투쟁을 전당, 전인민적으로 전개함에 대하여’라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당무위원회 결정에 따라 1973년까지 실시됐다.

이후에는 인민반이란 제도가 생겼다. 이젠 “북한은 선군정치를 통해 외형은 군대가 지탱하지만 내부는 인민반장이 지킨다”(전 함흥시 동흥산구역 인민반장 김영순)는 얘기까지 있다. 인민반장은 남한의 동(洞) 아래 반(班)에 해당하는 인민반을 책임진 사람이다. 인민반장은 매일 아침 1시간씩 동사무소에 들러 주민 동태를 보고한다.

다른 주민 감시 통제 조직도 있다. 김정일은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원인을 관료부패, 지도자의 리더십 부재, 지식인과 청년들의 이탈 등 세 가지로 지적하고, 내부단속을 위한 조직생활을 한층 강화했다.

1974년 김정일이 당 중앙이 되면서 확대 실시돼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조직생활은 일주일 단위로 반복되는 생활총화와 강연회, 독보회와 학습, 참배로 이어졌다. 마치 유사 종교를 방불케할 정도로 철저하다. 이러한 조직생활을 위해 전국적으로 10만 곳 이상의 ‘김일성동지 혁명사상연구실’을 꾸려 놓고 있다.

김정일 본인도 감시와 통제에 대해서는 자랑하듯 인정했다. 김정일은 80년대 중반 자신의 요리사인 후지모토 겐지씨에게 “우리 공화국에는 사람들이 쫙 깔려 있어도 100중 두 명은 감시자들이야. 걱정 마”라고 말했다.

김정일은 한국전쟁의 피해자들을 체제유지 세력으로 적극 동원하는 전략도 사용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통해 남한보다 많은 사망자가 발생함으로써 가족구조가 해체되다시피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성분분류 작업을 통해 전사자와 피살자 등 전쟁 피해자들을 구분하고 이들을 사회의 핵심군중으로 우대하는 이른바 ‘북한식 보훈정책’을 실시했다. 전쟁으로 인해 가족이 직접 피해를 당한 이들이야말로 단순한 세뇌교육이 아닌 가족관계와 혈연관계를 통해 전쟁의 두려움을 체험한 사람들로서 진정한 체제수호자가 될 수 있음을 확신했을 것이다.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수록 북한은 체제 유지를 위해 이런 종류의 사회통합 기제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수록 주민들의 삶은 더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북한 주민들로서는 끝없는 고난의 연속이다.<출처:chosun.com>

김병로 아세아연합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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