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연구] 외교관 김정일―2 핵 게임

▲ 김정일이 러시아 방문 중 레닌 묘지를 참배한 후 나오고 있다.
(도서출판 중심 제공)

지난 2월 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하 김정일)은 중국 특사로 평양을 방문한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자리를 마주했다. 화제는 북한 외무성이 2월 10일 발표한 핵 보유 및 6자회담 불참 선언이었다. 김정일은 “어제 오늘의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정일은 또 “미국의 적대정책 때문에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제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했다.

2002년 9월 김정일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도 핵 문제로 대화를 나눴다. 고이즈미 총리는 “핵 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위해 핵확산금지조약(NPT),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협정,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미·북 간 제네바 합의 등 모든 국제적 합의를 북한이 준수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고 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또 “(북은) 제네바합의의 약속 이행을 위해 사찰을 받아들여야 한다. 핵 문제는 미·북뿐만 아니라 일본과 동북아시아 전체의 문제”라고 했다. 김정일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관해서는 경수로 건설이 지연되는 것이 문제다. 미국이 성실하게 대응하면 해결된다”고 했다. 핵과 관련해 김정일은 항상 ‘미국의 성의’를 강조했다. 우리(북한)는 할 만큼 했으니 미국이 성의를 보이라는 식이다.

김정일은 현재 미국과 ‘핵 게임’ 중이다. 미국 또는 국제기구와 했던 합의들은 모두 휴지로 돌렸다. 그러면서 미국에 대해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김정일과 북한이 핵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2000년 3월 평양방송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방송은 “북한은 90년대 초반부터 제기됐던 핵무기 확산 방지가 미국의 최대 관심사라는 것을 포착하고 93년 3월 NPT 탈퇴 선언으로 드센 타격을 들이댐으로써 미국이 회담장으로 끌려나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또 1994년 10월 20일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이 보낸 제네바 합의 준수 약속 서한에 대해서도 방송은 “우리가 현 세기 최대 적대국가의 하나인 미국으로부터 이런 공식담보를 받아냈다는 것은 정치외교전에서 이룩한 빛나는 승리”라고 평가했다(연합뉴스 ‘김정일 백문백답’).

미국과의 게임에서 김정일이 이겼다는 식이다. 북한의 핵 게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평양이 남한을 비군사적인 부문에서 이길 희망이 없다는 사실에 자극받아 70년대부터 김일성이 핵무기 능력 개발을 시작했다(발레리 데니소프 전 평양주재 러시아 대사)는 얘기도 있는 것을 보면 김정일, 아니 북한의 핵 게임은 뿌리가 깊은 셈이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김정일은 미국과의 게임을 승리로 이끌고 있는가. 10여년의 핵 게임으로 김정일은 과연 북한의 국가·정권안보를 확보했는가.

첫째, 북한의 협상력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는 북한이 미국 이외의 대안을 확보할 수 있느냐다. 김정일이 미국에 기대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과실을 다른 나라에서 확보할 수 있다면 김정일의 대미 협상력은 높아진다. 그러나 북한의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을 대신하기엔 역부족이다. 북한이 국제금융기구의 회원국이 되어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빼줘야 한다. 김정일이 일본으로부터 받아내야 하는 식민지 지배 배상금도 미국의 양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반면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를 상정한 대안, 즉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이나 미사일방어(MD) 등을 추진해가고 있다. 결국 김정일은 미국의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과의 협상에서 취약함을 드러낸 셈이다. 미국을 전술적으로 기만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둘째, 협상 현안에 대한 열정을 보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부시 행정부는 북의 핵 포기와 핵 확산을 막겠다는 자세다. 북한은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면 핵을 포기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사안에 대한 열정에 있어선 북한이 미국보다 강해 보인다. 그러나 열정만 갖고 핵 게임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2000년 8월 김정일은 남측 언론사 사장단과의 대화에서 “작은 나라일수록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권국가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켜나갈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는 김정일이 아직도 전술의 변화를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 아니냐는 분석을 가능케 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이 정말 국가안보, 정권안보를 가져가기 위해서는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국을 대체할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더구나 미국은 김정일에게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최근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나 부시 행정부에서 “질질 끌 수 없다” “시간이 많지 않다” “언제까지 인내할 수는 없다”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김정일에게 선택을 위한 시간이 많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시 행정부에 김정일의 벼랑끝 전술도 더 이상 먹혀들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인권을 통한 미국의 대북 압박은 이미 시작됐다. 북한에 대한 체제변화(regime change) 얘기는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김정일이 국가안보, 정권안보를 위해서는 미국과 어떻게든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지금까지의 김정일식 핵 게임에서 김정일은 소득 없이 패자가 되고 있다./출처:chosun.com

김성한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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