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여맹(女盟)과 악연 털어내나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3.8국제부녀절'(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박순희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중앙위원장 등 여맹 간부들을 대동하고 축하 공연을 관람해 눈길을 끈다.

김 위원장은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에서 첫 업무를 시작한 이후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선출돼 오늘에 이르기까지 40여년간 여맹의 주관 행사인 여성의 날을 맞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한번도 없었다.

1960년대 중반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 선정을 둘러싸고 김 위원장과 계모인 김성애 전 여맹위원장과의 치열한 권력싸움에서 비롯된 여맹과의 오랜 악연 때문.

당시 김성애 위원장은 김 주석의 부인으로 퍼스트 레이디라는 유리한 입장과 여맹단체 수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친아들인 김평일 현 폴란드주재 북한 대사를 김 주석의 후계자로 옹립하려고 전처 김정숙의 아들인 김 위원장과 팽팽하게 대립했다.

특히 당시 김성애 위원장은 여맹을 노동당에 버금가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단체로 키웠고 이에 따라 여맹 간부들의 파워도 “나는 새도 떨어드릴 정도”로 높았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1974년 김성애와 김평일을 밀어내고 후계자로 선정되면서 여맹의 지위는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해 김성애 위원장과 그 자녀들을 ‘곁가지’로, ‘곁가지 우두머리’인 김성애가 위원장으로 있는 여맹을 무력화시키는데 나섰다.

핵심 간부들을 지방으로 축출시키고 중앙조직 구성원 일부만 놔둔채 지방의 하부말단까지 여맹조직을 해산시켜 직맹에 흡수시켰으며, 유일하게 노동당의 지도와 통제라인에서 ‘왕따’시켰다.

김 위원장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김성애 등 곁가지의 부활 가능성이 사라져 버린 1990년대 들어서면서 북한당국은 여맹에 대한 제재를 조금씩 완화하고 여맹을 직맹이나 농근맹과 같은 근로단체 수준에서 관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1998년 9월 김정일 체제가 공식 출범하기 전인 그해 4월 북한은 “여맹의 때가 조금도 묻지 않은”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부위원장 출신의 천연옥으로 전격 교체했고 2000년에는 박순희를 임명했다.

특히 박순희 위원장 체제 이후 여맹은 ‘김정숙 따라배우기’ 운동에 앞장서는 등 김정일 위원장에게 충성다하는 조직으로 완전히 탈바꿈을 했고 여성들 속에서 국가경제와 교육, 다산운동과 자녀를 많이 키워 군대 보내기 등 노동당의 정책 집행에 앞장서고 있다.

김 위원장이 이번 ‘여성의 날’ 공연을 관람한 것은 과거 여맹과의 악연을 털어버리는 행보일 뿐 아니라 북한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갈수록 높아가고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1990년대 최악의 식량난을 가져온 ‘고난의 행군’ 이후 급감한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출산율을 높여야 하며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국가경제와 선군정치를 위해 헌신하고, 자녀들을 ‘사회주의 사상과 도덕’을 갖도록 키우게 하려면 여성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

더욱이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탈북 현상과 매춘행위로 인해 북한의 인권문제가 국제사회의 도마위에 오르고 불법적인 장사행위 등으로 사회적 이완 현상이 증가하는 데는 여성들이 크게 ‘한몫’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들을 독려하고 체제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다.

김 위원장의 이날 공연에 여맹 간부들과 함께 평양시에 살고 있는 최고인민회의 여성 대의원(국회의원), 여성 작가와 기자, 방송원, 창작가, 예술인들이 대거 참석한 것도 이를 보여준다.

서재진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한은 올해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사회주의 본태를 살려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여성들이 장사의 주류가 되고 비사회주의 현상의 중심에 서있는 만큼 이들을 사회주의 체체 속에 적극 포함시키고 충성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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