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쓰러져도 계속되는 ‘北核협박’ 왜?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검증팀에게 일주일내에 영변 핵시설의 재처리시설(방사화학실험실)을 재가동할 것임을 통보함으로써 북핵문제가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 北 ‘살라미 전술’로 단계적 美 압박=북한은 지난 6월 핵프로그램 신고서 제출 이후 검증체계를 두고 협상을 벌여온 미국과의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북한은 19일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 지연을 이유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재가동할 뜻을 밝힌 이후 단계적으로 위기감을 심화시키고 있다.

지난달 14일 핵불능화 중단 선언 이후 이달 22일 급기야 북핵 불능화 작업을 감독해온 IAEA에 핵시설 봉인 및 감시카메라 제거를 요청했고 이틀만인 24일 검증팀에 의해 영변 핵시설의 봉인과 감시 카메라도 제거 작업이 완료됐다.

또 북측의 요청으로 IAEA 검증팀은 앞으로 재처리시설에 접근할 수 없게 됐다. 이는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하겠다는 위협을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신호로 간주된다. IAEA도 앞으로 영변 재처리시설 관련 상황을 확인할 수 없게 됐다.

이로써 핵탄두에 넣을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최종단계인 재처리시설의 가동이 가시권에 들어옴에 따라 검증체계에 대한 북한과 미국 간의 이견으로 고비를 맞은 북핵 6자회담은 중대 위기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전형적인 ‘살라미 전술’을 취하고 있다”며 “단계적으로 압박카드를 하나씩 내밀며 미국의 입장변화를 촉구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 재처리시설 복구의 의미=전문가들은 재처리시설이 당초 3∼4가지 불능화조치가 취해졌지만 핵심시설이 그대로 보존돼 복구에는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한 달 이후 핵탄두에 넣을 플루토늄이 본격 생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북한은 천연상태의 우라늄 정제 → ‘미사용 연료봉’ 제조(핵연료봉 공장) → ‘사용후 연료봉’ 제조(미사용 연료봉 연소·5MW원자로) → ‘무기급 플루토늄’ 제조(사용후 연료봉 속 플루토늄 농축·재처리시설) 등의 과정을 거쳐 핵탄두에 넣을 플루토늄을 만들어왔다.

북한은 작년 말부터 5MW 원자로에 들어있던 8천개의 사용후 연료봉 중 현재 4천700여개를 꺼내 수조에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재처리시설에 넣고 농축하면 핵탄두를 1개 이상 제조할 수 있는 6∼8㎏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

실제 방사화학실험실은 거의 불능화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보관중인 사용후 연료봉을 꺼내 곧바로 농축에 돌입할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방사화학 실험실은 아직 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따라서 1~2개월이면 플루토늄 재처리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들은 그동안 북한의 영변 재처리시설에 대한 불능화에 초점을 맞춰왔다.

북한의 핵시설 복구가 검증체계 구축에 있어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협상카드인지 아니면 부시 행정부하에서 미국과의 협상은 포기한 것인지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다만 미국이 그동안 ‘국제적 수준’의 검증 체계 마련을 주장해온 만큼 이 입장에서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을지, 그리고 북한이 어느 수준의 양보면 수용할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전성훈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부시 행정부도 ‘검증 의정서’가 먼저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북핵문제는 미국의 차기 정부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6자회담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 김정일 건강이상과 관련있나?=북한은 김정일이 마지막 공개 활동을 한 8월 14일 핵불능화 중단을 선언했다.

특히 지난달 26일 핵시설 원상복구 방침을 밝힌 북한 외무성의 성명에서는 ‘해당 기관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6자구도가 과연 필요하겠느냐’ ‘미국의 자주권 침해’ ‘미국에 고분거리지 않는 나라’ ‘(테러지원국) 명단에 그냥 남아 있어도 무방’ 등 강경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이후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이 확산됐고 북한은 단계적으로 핵시설 복구 조치의 수위를 높여 왔다.

김정일이 여전히 병상에서 핵문제를 직접 챙기고 있는 것인지, 주변의 핵심 측근들이 김정일의 사전 지시에 따라 수순을 밟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북한이 그동안 핵문제를 체제 결속에 이용해 왔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윤 교수는 “김정일의 와병설이 불분명하지만 사활적인 북핵문제의 경우에는 김정일만이 지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전 연구위원도 “김정일 이외의 인물이나 집단이 북핵문제를 컨트롤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북한의 다음 카드는=북한은 미국의 검증체계에 대한 양보조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 등을 조치가 취해지기 전까지는 불능화 원상복구와 재처리에 속도를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 수개월에서 1년여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원자로 복구에도 돌입할 가능성이 있다. 단계적으로 불능화 원상복구 속도를 조절하면서 미국 등과 협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3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IAEA 검증팀은 앞으로도 영변에서 원자로와 다른 핵관련 시설의 가동 중단 상태는 계속 모니터링하게 된다. 또 사용후 연료봉은 아직 봉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용후 연료봉의 봉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IAEA에 다시 제거 요청을 해야 한다면서 북한이 조만간 이 같은 요청을 할 것으로 전망했다.

◆ 북핵협상의 향방은=일단 미국이 기존 핵검증 이행방안에 대한 북한의 거부 반응을 고려해 완화된 수정안을 제시하고, 중국이 북한에 수용할 것을 권고한다면 절충의 가능성은 있다.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21일 뉴욕에서 이뤄진 김숙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의 협의후 “매우 어려운 상황이지만 협상을 진전시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의 이번 조치는 북한이 뉴욕 유엔총회를 계기로 열리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양제츠(楊潔지) 중국 외교부장의 양자회담을 앞두고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하지만 라이스-양제츠 양자회담에서도 절충점을 찾지 못하고 한국과 미국 등이 북한에 대한 경제·에너지 지원을 중단할 경우엔 협상은 결렬될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 대선(11월4일)이 임박해 있어 북한이 차기 행정부와의 협상을 고려할 수도 있다.

북한이 차기 행정부와의 협상을 잠정 결론지었다면 6자회담은 장긴 공전상태에 빠지게 된다. 차기 행정부의 외교안보팀의 구성 시점에는 이미 북한의 핵시설 원상복구가 거의 완료되는 시점이 되므로 6자회담 무용론이 본격 대두될 가능성이 크다.

윤 교수는 “북한이 차기 미국 행정부와 북핵협상을 시도할 경우 새 행정부가 출범해 외교라인이 정비되는 내년 상반기 이후까지 약 1년간 북핵 협상이 공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핵심 당사국인 미국은 사태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상황에 대처하고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24일 “북한의 핵시설 재가동 조치로 인해 6자회담이 끝나는 것은 전혀 아니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선정국에 들어가 있는 부시 행정부나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이 병상에 누워 있는 북한이나 모두 한치의 양보도 기대할 수 없는 ‘벼랑 끝’ 형국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란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