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선물보다 ‘더 좋은 선물’ 받으면 괘씸죄?

▲중국 창바이에서 바라본 혜산시 성후동 모습. 사진 가운데 건물은 혜산예술대학으로 건물 중앙에 김일성 사진이 보인다. ⓒ데일리NK

명절이나 생일 같은 날에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들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풍습이다. 북한에서도 생일날 가족들끼리 선물을 하곤 한다. 그러나 이 선물 때문에 큰 말썽이 생긴 적이 있다.

북한에서 선물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배려라는 인식 때문에 중국 조선족에게서 선물을 받은 국경지역 주민들이 공개심판 자리에 오른 적이 있다.

2003년 4월 말 양강도 혜산에서는 도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설 명절 선물’사건에 대한 공개심판이 실시됐다.

이날 공개심판은 김정일의 직접지시로 이뤄졌다. 혜산시 당위원회는 혜산경기장에 주민들을 집결시킨 다음 범죄자에 대한 죄목을 발표하고 즉결 심판을 진행했다.

이날 공개심판에서는 혜산시 혜탄동 ‘34 인민반’ 가정주부 15명을 포함해 48명의 주민들이 노동단련대형을 선고 받았고, 죄가 무거운 18명은 현장에서 수갑을 채우고 공개체포했다.

양강도 출신 탈북자들은 “당시 이 사건이 정말 대단했다”면서 “주부들이 재판장에 끌려나온 것도 그랬고, 그 주부들이 체포되면 가족들은 누가 먹여 살리냐며 말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창바이와 혜산간 밀수가 사건 발생 원인=2003년 설 명절을 맞아 압록강 맞은편 중국 창바이(長白)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이 평시 알고 지내던 혜산시 주민들에게 명절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창바이현 마록구와 마주하고 있는 혜산시 연풍동, 창바이현 하강구와 마주하고 있는 혜산시 혜탄동은 평소에 생계형 밀수가 잦은 곳이다. 장마당과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생계를 유지할 마땅한 수단이 없어 이곳 주민들은 밀수를 통해 식량과 생필품을 마련하고 있다.

주로 봄이나 가을엔 개구리, 그리고 여름엔 약초, 그 외 구리 같은 광물들을 중국에 넘겨주고 쌀이나 식용유, 술과 담배를 비롯한 생필품들을 넘겨받는다.

밀수하는 과정에 알게 된 중국 조선족들은 명절이면 이곳 주민들에게 선물을 보내곤 했다. 앞으로도 잘해보자는 뜻이다. 이곳 주민들뿐 아니라 밀수를 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흔히 있는 일이다.

국경 주민들의 경우 중국 사람들이 명절이나 생일에 보내주는 선물의 양과 품목이 정해져 있다. 보통 중국 인민페로 15~20원(약 2,000~2,500원) 정도에 해당하는 선물을 한다.

선물은 대부분 세트로 구성되는데 내용물에는 찹쌀 1kg, 입쌀 2kg, 밀가루 1kg, 기름 1병, 술 1병, 사과 3개, 배 2개, 토마토 3개, 마늘 1봉지(200g 정도), 사탕과자 1봉지가 들어있다. 물론 관계에 따라 바나나와 담배 1보루를 더 보내주는 경우도 있다.

◆ ‘설 선물’ 사건 노출 과정=이러한 선물 관행을 문제 삼은 단위는 평양에서 내려온 비사그루빠였다.

2003년 2월 말 양강도에 내려온 비사그루빠는 혜산시 연풍동을 검열하던 중 한 주민으로부터 중국 사람들을 통해 설 명절 선물을 받았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러한 검열 결과가 평양으로 보고 되자 김정일은 “철저히 조사해 대책을 세우라”고 다시 지시를 내렸다. 이로 인해 비사그루빠 인원이 보충되고 대대적인 추가 검열이 진행됐다.

검열에 앞서 비사그루빠는 인민반마다 순회하면서 “어머니 당은 관대하다. 당은 거짓말을 안 한다.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은 다 용서해 주지만 마지막까지 숨기는 사람들은 엄격하게 처벌한다”고 주민들을 회유했다.

그러자 주민들이 혹시 감추었다가 훗날 일이 더 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진 출두해 선물을 받은 사실을 자백했다. 그러나 김정일이 철저히 밝히라는 지시가 내려온 이상 이 사건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었다.

주민들의 자백을 바탕으로 사건을 파헤친 비사그루빠는 2003년 3월부터 연루자들을 체포해 보위부 감옥에 수감했다. 주민들은 비사그루빠가 약속한 ‘관대한 용서’가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혜산시 혜탄동과 연풍동 인근 주민들 상당수가 공개심판 대상이 됐다. 국경지역에서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 밀수를 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족의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당국도 알았지만 김정일의 지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혜산시 혜탄동과 연풍동 주민들에게 조사가 집중된 이유는 이곳 인민반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혜산시 성후동이나 혜장동 같은 곳은 밀수가 가장 많은 곳이면서도 노동당 간부급들이나 돈 많은 사람들이 배후에 있어 처벌에서 면제됐다. 혜탄동이나 연풍동은 외곽지역으로 공장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 ‘설 명절선물’사건이 왜 큰 문제가 됐을까?=북한에서 선물은 김일성, 김정일이 당과 주민에게 베푸는 특혜라고 강조한다. 가족들끼리 노트, 장갑, 액세서리 같은 생일 선물을 할 수는 있지만, 여러 사람에게 선물을 돌리는 것은 문제가 된다.

김일성, 김정일이 주는 것은 ‘선물’이고 개별적인 사람들끼리 오가는 물건들은 ‘뇌물’이 된다.

북한은 1980년도부터 김일성, 김정일 생일이면 소학교(초등학교)까지 어린이들에게 사탕이나 과자를 선물이라고 주는데 무게는 다 합쳐서 1kg 정도이다. 김일성, 김정일은 자신들의 생일에 선물을 베푸는 것을 크게 선전하고 자랑거리로 삼는다.

중앙에서 큰 회의를 한 후에도 김일성, 김정일의 이름으로 된 선물을 준다. 선물을 통해 큰 은혜를 베푼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상대방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이런 통치행태를 가리켜 ‘선물제도(정치)’라는 말까지 한다.

‘혜산 설 선물 사건’ 당시 주민들은 중국인에게서 김정일 선물 보다 더 양질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김정일이 화가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주민들은 선물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지 않았다. 국가가 먹여 살리지 못해 가정주부들이 생계형 밀수를 했고, 이 과정에서 선물을 받았는데 무슨 죄가 되냐는 것이었다.

중국 조선족에게 선물을 받은 혐의로 가정주부들이 상당수 처벌을 받았지만 주민들은 김정일과 당국의 속 좁은 행위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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