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생모 김정숙 秘 스토리

김일성, 김정숙, 김정일의 가족사진

미국의 비행(非行)청소년 수련단체가 발표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비행청소년을 바로잡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실시한 결과, 어머니를 기억하는 청소년의 70~80%는 성공적인 치유를 이룬 반면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은 그것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인간의 심리형성에 미치는 영향 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생모(生母) 김정숙은 혁명가, 아내, 모성의 모델로 전형화되고 전 사회가 그녀를 따라 배우도록 강요되어 왔다. 김정숙은 바느질 잘하고 음식 잘하고 싸움 잘하고 총 잘 쏘고 말 잘 타고 남편내조 잘하고…….. 좌우간 김정숙은 못 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단다. 지상의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잔뜩 미화된 김정숙의 이런 만능 슈퍼상(象)에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영웅 김정숙이 아니라 온기도 감정도 없는 무미건조한 인조인간 김정숙의 실체다. 하지만 북한에서 인간 김정숙을 파악할 계기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과 김정숙이 10년만에 결혼한 사연

1970년대 초,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황해남도 삼천군 달천 영예군인요양소에 항일투사 황순희가 요양을 왔다. 항일빨찌산 시기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과 아동단 사업을 함께 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김정일을 김일성 후계자로 내세우는 데 1등 공신으로 인정 받아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에 임명되었고 항일투사 중에서도 최고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엔 그녀의 존재가 두드러지지 않을 때였고 그녀의 사무실엔 나의 큰오빠와 약혼중인 형님이 있어 자주 들락거렸는데 한번은 그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가 1933년 초봄이었던가, 김정숙동무가 김일성동지를 처음 뵙고 온 날이었는데 너무 흥분해서 밤잠을 다 못 자더라구요. 함께 갔던 사람들은 별 반응 없었는데……. 아무튼 김정숙동무는 뭔가 특별했어요.”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 첫 눈맞춤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때 다른 여대원들은 아무 반응 없었다고 했다. 김일성이 그때까지 그렇게 욕심낼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김정일의 출생연도는 1942년(압도적인 북한인민들은 김정일이 40년이나 41년생인데 김일성 출생연도인 1912년의 2짜와 짝수를 맞추느라고 출생년도를 늦추었다고 믿고 있음)이다. 김정숙이 김일성과의 결혼을 10년만에 ‘골인’ 한 셈이었다. 첫눈 맞춤을 사랑으로 연결시킨 두 연인이 자기들의 결혼시기를 10년이나 미루어왔다는 사실은 그들의 특별한 내부사정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김일성의 애인은 유부녀 빨치산 최희숙

바로 그 내부 사정이 문제였다. 북한에서 내가 알고 있던, 출신이 보위부계통이라서 온갖 고급정보를 유난히 많이 알고 있던 어느 문인(文人)은 언젠가 신빙성 있는 정보 하나를 나에게 흘려주었다.

김정숙의 김일성을 향한 사랑은 한동안 짝사랑인 채 묻혀있어야 했다. 이미 유부녀인 빨치산 최희숙과 김일성의 사랑이 현재 진행 중에 있었다. 인격이나 지적 능력이나 인물로써나 김정숙은 최희숙을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김일성의 겉옷부터 속옷에 이르기까지 온갖 의류들을 최상의 바느질 솜씨로 철따라 지어내는가 하면, 매끼니 만드는 음식솜씨는 그 가짓수며 맛이며 모양새에 있어서 감히 여자동료들이 흉내 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철두철미하게 현모양처형이면서도 뛰어나게 걸출했던 최희숙의 김일성을 향한 사랑은 봉건유교관습에 의해 중매결혼당한 남편의 생존여부조차 문제시되지 않았다고 했다. 최희숙은 김일성이 출동한 사이 부상병들을 책임지고 밀영에 남았다가 어느 내부 밀고자에 의해 일본군의 불의의 습격을 받았다.

밀영은 불타고 최희숙은 일본군에게 붙잡혔는데 두 눈과 양 젖가슴을 군도로 도림받는 참변을 당했다.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연속 권에 나오는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 편이 바로 이 최희숙 참살사건을 다룬 내용이다.

항일무장투쟁사에 여성빨치산이 일본군에게 잡혀 이렇듯 악형을 당한 사례는 최희숙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최희숙이 김일성의 애인이란 정보를 받은 일본군이 김일성을 붙잡지 못한 화풀이를 그녀에게 한 것이라고 했다. 그때가 1930년대 말 경 이었다.

빨치산 출신들이 사후(死後) 안치되는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 제1열에는 최용건, 김책, 김정숙 등과 같은 북한 최고 실세들의 흉상이 빼곡이 채워져 북한의 계급차별문화를 과시하고 있는데, 바로 그 행렬에 최희숙의 반신상도 당당히 들어 있다. 김일성 애인 권력으로 이른 자리라고 하였다.

불행하게 죽어간 생모에 대한 김정일의 어두운 기억

김정숙은 최희숙이 죽은 이후에야 비로써 김일성의 애인자리를 온전히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5년도 못 가 김성애라는 라이벌 여성과 김일성을 놓고 또다시 운명적 대결을 벌여야 하였다. 김일성이 북조선 주둔 소련군 노마니꼬브 사령부의 타자수로 있던 15년 연하인 김성애에게 이성적 접근을 시작한 탓이었다.

김성애라는 여성 일개인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노마니꼬브 사령부의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는 절박한 정치적 이유가 김일성의 여성편력을 열심히 부추긴 듯했다. ‘함경도 내기’라면 손 사레 치던 평안도 출신 김일성의 친켠(만경대일가)쪽에서 함경도 태생 김정숙보다는 평안도 출신 김성애 쪽에 더 손들어준 원인도 있었다.

고독했던 김정숙은 난산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출장 중이었던 어느 날, 의사들을 일체 들이지 않고 방문을 안으로 닫아건 채 홀로 해산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김정숙은 부부싸움 도중 김일성이 홧김에 쏜 총알에 맞아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음) 즉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은 자기의 사랑을 일평생 타인에 의해 침해당해야 한 까닭에 인간의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정리하지 못한 채 죽음에 내몰린, 세상에 대한 비행으로 생을 마감지은 자의 불안정한 삶이었다.

김정일이 이런 생모에게서 인간과 세상에 대해 어떤 계시를 암시받았으리란 추측은 그리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김정일이 보이고 있는 온갖 행태가-국제적 비행인간, 그 외에 붙여줄 수 있는 이름이 달리 생각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비행은, 모성을 기억하면서도 치유가 불가능한 20~30%의 선에 속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북한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들려오는 온갖 탈북자 대량살육 소식이 그 슬픈 추측을 갈수록 확실하게 해 주고 있다.

최진이 / 前 조선작가동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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