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덩샤오핑이 못되는 세가지 이유

김정일의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여럿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은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를 통해 공식 천명되었다. 그 중심에는 덩샤오핑(鄧小平)과 개혁세력이 있었다. 덩샤오핑은 부도옹(不倒翁 ; 오뚝이)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1920년 공산당에 발을 내디뎌 1981년 전권을 장악하기까지 그는 3차례 실각되었다가 다시 일어서는 파란만장한 인생여정을 겪었다.

1933년 공산당 국제파에 밀려 장시성(江西省) 당서기직에서 해직된 것이 1차 실각이고,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파면돼 64살의 나이에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 2차 실각이며, 1976년 톈안먼(天安門) 시위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돼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간 것이 3차 실각이다.

1977년 덩샤오핑의 복귀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20년 동안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중국이 마지막 순간에 길어 올린 ‘희망’이었다. 그는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용기있게 지적하였다 실각하고, 문화대혁명으로 본인이 고생한 것은 물론 큰아들이 홍위병(紅衛兵)들에게 맞아 하반신 불구가 되는 아픔을 겪은 구시대의 피해자였다.

바로 이것이 ‘김정일의 북한’이 ‘덩샤오핑의 중국’이 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다. 덩(鄧)은 구세력을 치고 올라온 개혁세력이었지만 김(金)은 오늘날 북한의 비극을 불러온 가해자이며 수구세력이다. 역사상 어느 수구세력이 일시에 개혁세력으로 돌변한 예는 없다.

실용주의자와 군국주의자의 차이

1978년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고 나서 덩(鄧)은 일본을 방문했다. 1979년에는, 당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핵심 적국(敵國)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을 방문했다. 우방국인 중국을 방문하면서도 일체의 일정을 비밀에 부치며 숨어 다니고 있는 김정일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대목이다. 덩(鄧)은 어디를 가나 당당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즈음 덩샤오핑은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자가 되라’는 선부론(先富論)을 주창했으며, 1950년대부터 제기해왔던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그 유명한 흑묘백묘(黑描白描)의 실용주의 노선을 분명히 했다.

주위에서는 개혁개방을 할 것이라고 수년 전부터 기대하고 있지만 하는지 마는지 시늉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질질 끌면서, 오로지 선군(先軍)을 외치며 “내가 믿는 것은 군대뿐”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는 김정일과는 극과 극의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이는 실용주의자와 군국주의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인민생활의 발전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사람과 오직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모든 관심이 쏠려있는 사람의 차이다. 김정일이 설령 개혁개방의 제스처를 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권력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제한적 조치에 불과할 것이며, 이것이 권력에 초연해 단지 ‘실권자(實權者)’라는 명칭으로 불리면서 개혁개방을 진두 혹은 배후에서 지휘해온 덩(鄧)과 다른 또 하나의 차이점이다. ‘김정일의 북한’이 ‘덩샤오핑의 중국’이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의 차이

그야말로 오척단구인 152㎝의 작은 키였지만 덩(鄧)은 대단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보인 ‘거인’이었다. 1979년 4개의 경제특구(선전, 주하이, 샨터우, 샤먼)를 제시해 밀어붙였고, 1984년에는 14개의 연안도시(상하이, 칭다오, 다롄, 톈진 등)를 개방했다. 이러한 개방정책은 완전개방에 이르기까지 4차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덩(鄧)이 이렇게 전방위의 개혁개방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일개인의 지휘력을 담보해주는 집단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은 바로 중국공산당이었다.

덩(鄧)은 개혁개방의 설계자 역할을 하면서, 비록 화궈펑(華國鋒)과의 대립이 있었지만, 자오쯔양(趙紫陽), 후야오방(胡耀邦)을 쌍두마차로 하며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힘으로 개혁개방 노선을 밀고 나갔다. 비록 비민주적, 권위주의적이라는 비난이 있을 수 있지만 중국공산당이라는 체계있는 권력조직이 없었다면 13억 인구를 질서 있게 통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노동당, 개혁추진 세력 될 수 없어

지금의 북한은 조선노동당이 있긴 하지만 1970년대 후반의 중국공산당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껍데기 집단이다. 당의 집단지도체계와 논의구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수령의 명령이 당의 권위를 억눌러 버린 지 이미 수십 년 째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조선노동당의 최고지도기관인 당대회가 25년째 열리지 않고 있으며, 당중앙위 전원회의와 중앙군사위원회가 12년째 소집되지 않고, 당사업을 결정하는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김정일 혼자만 남아있어 사실상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기업소와 주민들 사이에서도 당과 당원의 지위가 계속 추락하고 있으며, 입당 및 당직에 대한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중앙당 비준 문서보다 김정일의 ‘친필 사인’이 열 백 배의 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북한을 상대해 본 사람은 상식처럼 알고 있다.

물론 이렇게 모든 권력이 김정일에게 집중된 것이 강력한 개혁개방을 추진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나, 1980년대 초반과는 차원이 다르게 복잡해진 21세기 초반의 개혁개방문제를 일개인이 전권을 쥔 채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파멸의 길이다. 이것이 ‘김정일의 북한’이 ‘덩샤오핑의 중국’으로 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다.

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