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남북관계 개선”…믿고, 검증하고, 공세적으로 가자

상황이 또 ‘재미있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일까?

최근 방북한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베이징 ‘한중일 3국 정상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남한과 관계개선 의지가 있다”는 김정일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원 총리는 “김정일위원장을 10시간 동안 만났는데, 북한은 미국뿐 아니라 한국·일본과도 관계를 개선하려고 한다”며 “이것이 이번 방북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인상”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원 총리의 말은 ‘김정일은 미국 및 한국, 일본과 양자대화, 다자대화를 통해 핵심현안을 해결하고, 6자회담을 통해 북핵문제를 마무리 짓겠다는 구상’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원총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야 (북핵 문제)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각국이 인식하고 파악하기 바란다”고 언급했으며, 어느 베이징 외교소식통은 “원총리 방북 당시 북한이 언급했다는 6자회담은 현안을 직접 논의한 기존의 6자회담과 전혀 다른 틀”(조선일보 10월 12일자)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 의지 있다”는 김정일의 간접 제의에 대해 “북한이 진정으로 핵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열린 자세로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답했다.

김정일이 언급한 ‘남북관계 개선’의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분명치 않다. 또 한미일과 양자대화를 통해 어떤 핵심 현안을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것인지, 앞으로 6자회담이 다르다면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지 등등은 안개 속에 있다.

김정일은 원자바오 총리를 통해 한미일에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그보다 먼저, 이번 김정일이 원총리에게 전한 언급이 과연 ‘진정성’이 있는 것일까? 중국이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그동안 북핵 해결에 진전이 없으니까, 의장국 지위를 상실할까봐 이른바 ‘자가 발전’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동안 김정일이 해온 여러 행동 패턴을 염두에 두면서, 이번 ‘미국 및 한일과의 관계개선’ 언급에 대해 이런저런 각도로 한번쯤 추상해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진 않다.

김정일이 그동안 한미 양국에 요구해온 핵심현안은, 미국과는 ‘조미 평화협정 체결'(=대북 적대시정책 포기=주한미군 철수=한미군사동맹 파기)이며, 2000년 이후부터 남한에게는 ‘6.15, 10.4 선언 이행’이다. 또 일본과는 ‘식민지 배상금 협상'(=조-일 국교정상화) 논의가 있다.

현재 김정일 입장에서 향후 6자회담이 오로지 ‘북핵 폐기 회담’으로 성격이 규정될 경우, 가뜩이나 유엔제재를 받고 있는 마당에 ‘아젠다 설정’부터 불리해진다. 또 김정일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어차피 핵보유국’인데, 6자회담이 ‘북한 핵폐기를 위한 회담’으로 규정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김정일은 먼저 ‘6자회담 성격 규정’을 자신에게 좀더 유리한 방향으로 새로 하고 싶은 것이다. 그 방법으로 미국 한국 일본과의 양자회담에서 여러가지 아젠다들을 늘어놓는 전술로 가져가고 싶은 것이다. 북한의 전형적인 본질(핵폐기) 흐리기 전술이지만, 김정일 입장에서 이 전술이 성공하면 한국, 일본으로부터 받을 경제지원이 상당할 것이며, 실패해도 ‘본전 장사’나 다를 바 없다. 또 미국, 일본과의 양자대화 아젠다들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이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역대 남한 정부와 모두 상대해본 경험이 있다. 각 정부의 축적된 자료만 해도 상당하다고 한다. 하지만 남한은 5년마다 선거를 통해 새 정부로 바뀐다. 이 때문에 남한의 새 정부는 김정일 정권을 늘 ‘처음’ 상대하는 것처럼 된다. 처음 상대하다 보니 상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새 정부는 그 전 정부보다 대체로 더 잘 해보려고 노력한다. 의욕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과잉’이 나오게 되며, 원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정권의 전술에 말려드는 경우가 생긴다. 6.15 선언, 10.4 선언이 그런 흐름과 맥락에서 전개된 것이다. 또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대통령 업적’이 중요해지며, 그래서 북한과 절충주의, 타협주의로 흐르게 된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이익이 중요지는 게 아니라, 해당 정권의 대통령 업적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는 그 내용에서 얼마간 차이가 있지만, 형식의 면에서 미국, 일본도 크게 예외적이지 않다. 일본도 역대 정권이 끊임없이 북한과 모종의 외교적 큰 성과를 위해 노력해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클린턴 정부도 제네바 합의를 했지만 북핵포기에 실패했고, 부시 정부도 막판에 북한과 ‘절충’하려다가 실패했다.

현재 한국 미국 일본은 한번도 김정일 정권과 본격 접촉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은 아직 ‘새 정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일본과 양자대화를 하다보면 아젠다 자체가 금세 1~2년은 흐르게 되어있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집권 후반기’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각 정부는 다음 선거 전에 무엇인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싶어 한다. 클린턴, 부시, 노무현 정부가 공히 그랬었다.

물론 지금은 이같은 전망에 반대하는 이론도 많을 것이다. 이제는 한미일이 김정일의 그런 수법을 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핵폐기 프로세스에 성과 없이는 유엔 제재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외교라는 것은 늘 상대적이기 마련이다. 양자, 다자대화가 시작되면서 ‘말(言)로써 하는 외교전(戰)’을 계속 하는 동안 ‘외교전 그 자체’에 각국 정부와 언론의 관심이 쏠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각국 정부와 언론은 일정한 ‘성과’에 기대를 걸면서 타협주의로 흐르거나, 또는 회담이 끊어지고, 이어지는 것이 되풀이 되게 된다. 그러면서 한미일은 집권 후반기로 간다.

지금 시점에서 북핵문제를 전망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앞으로 양자, 6자회담이 진행되면서 북핵 문제를 둘러싼 미북간의 ‘마지막 절충’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매우 비관적인 각도에서 전망해본다면, 김정일이 ‘북한은 핵(무기, 물질)을 대외에 이전하지 않는다’는 정도로, ‘비확산’을 미국과 협상하면서 94년 제네바 합의와 비슷한, 다시 말해 언제든 김정일이 찢어버리기 쉬운 ‘종이 서약서’ 한 장을 만들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면 그런 비관적 전망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이번 김정일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믿어주기는 하되, 김정일의 말에 ‘주관적인 희망사항’을 부여하지 않고 우리가 현실에서 ‘제대로 검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남북관계 개선’의 명확한 기준을 갖는 것과 같다.

첫째, 남북관계 개선이 북한의 핵폐기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는가?

둘째, 남북관계가 북한의 개방을 추동하고 정상국가로 가도록 하는데 합목적적인가?

셋째, 남북교류가 북한주민의 실생활 개선에 도움을 주고 있는가?

넷째, 남북대화와 교류가 납북자 국군포로 이산가족 해결 및 북 주민 인권 개선에 기여하고 있는가?

다섯째, 남북관계가 한반도평화체제 및 평화통일에 진전을 보여주고 있는가?

남북관계 개선은 이상 5가지에 적절하게 부합하고 있느냐를 의미한다. 이 기준에서 정부는 대북정책의 유연성을 갖되, 사안의 본질을 흐리는 절충주의나 봉합주의로 흘러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대목이 있다. 그것은 비핵개방3천과 ‘그랜드 바겐'(일괄타결)이 성공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남북관계에서 과거처럼 ‘공산당이 쳐내려 온다’ 식의 대북정책으로는 곤란하다. 북한의 개방을 위한 능동적 플랜을 전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굳이 말을 만들자면 능동적으로 일을 하자, ‘렛츠 두 어프로치'(Let’s Do Approach)라고 할까, 대북 공세적 접근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12일 우리정부가 임진강 수해대책 방지 회담과 적십자 회담을 북한에 공세적으로 주문한 것은 좋다.

좀더 두고 봐야겠지만, 중국의 ‘중재’로 일단 북핵 문제는 ‘외교전’ 양상으로 들어갈 조짐이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안보팀이 그동안 준비가 잘 되었다면 이제부터 실력을 발휘할 때가 온 것 같다. 앞으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잘 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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