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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정동영 장관에게 북핵문제와 관련한 몇 가지 발언을 했다.
핵심 내용은 ▲한반도 비핵화 유효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면 7월중 6자회담 복귀용의 ▲핵문제 해결되면 NPT 복귀, IAEA 사찰허용 등이다.
국내 언론들은 ‘북한 7월중 복귀용의’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외신들은 ‘미국이 북한을 인정하고 존중할 경우’라는 김정일의 전제조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다.
김정일의 발언을 두고 뭔가 아리송하다는 느낌이 든다. 김정일의 발언에 뭔가 복선이 깔려져 있는 듯한데, 전체 그림은 명료하게 잡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김정일의 일련의 발언들이 얼핏 듣기에 매우 깜찍하기 때문이다.
거짓말, 그리고 화려한 수사
정장관은 기자 브리핑에서 김정일을 ‘시원시원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로 평가했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 유효→7월중 6자회담 복귀용의→핵문제 해결되면 NPT 복귀 및 IAEA 사찰허용→ 서해 NLL 긴장해소 위한 장성급 회담 개최→서울-평양 육로 상공 왕래협의 등으로 이어지는 김정일의 발언이 어디 하나 거칠 것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정장관은 한반도 비핵화 유효→7월중 6자회담 복귀용의→핵문제 해결되면 NPT 복귀 및 IAEA 사찰허용으로 이어지는 김정일의 발언에 귀가 번쩍 띄었을 것이다. 김정일의 말대로 수순이 이어지면 북핵문제는 시원시원하게 해결된다.
그러나 김정일의 발언은 거짓말로 시작해서 화려한 수사(修辭)로 끝났다. 문제는 김정일의 거짓말이 앞뒤가 그럴 듯하게 엮여져 있다는 것이다.
94년도 ‘재고 물품’ 다시 선보여
김정일의 거짓말의 출발은 ‘한반도 비핵화 유효’ 대목이다. 이 말을 하면서 김정일은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전제까지 달았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가 비록 2월 10일 핵보유 선언을 했지만, 김일성의 유훈처럼 우리는 어디까지나 한반도 비핵화를 원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 다음 김정일의 발언은 7월중 6자회담 복귀용의→핵문제 해결되면 NPT 복귀 및 IAEA 사찰허용으로 이어진다. 이 그림은 어디에서 많이도 보았다.
1차 핵위기가 최고조에 오른 94년 김일성은 카터를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핵을 개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며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를 원한다”고 했다. 김정일의 말도 똑같다.
정장관 기자 브리핑 이후 언론에는 북한이 지난 2월 10일 핵보유 선언을 한 마당에 한반도 비핵화를 언급한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정확한 지적이다. 김정일이 명백히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김정일이 왜 이 시점에서 누가 들어도 ‘새삼스러운’ 한반도 비핵화 유효를 들고 나왔느냐 하는 점이다.
1차 핵위기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으로 촉발되었다. 2002년 10월부터 전개된 2차 핵위기는 농축우라늄 핵개발 증거에서 시작되어 지난 2월 10일 핵보유 선언으로 증폭되었다. 1차가 ‘의혹’이라면 2차는 ‘보유 핵무기 프로그램’을 놓고 협상이 진행되어 온 것이다.
여기에 암수가 있다. 김정일의 한반도 비핵화는 ‘우리는 이미 핵보유국이니까 미국과 핵보유국 대 핵보유국끼리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논의해보자’는 의미다.
말하자면 1차 위기 때 김일성의 주장이 “우리는 핵개발 안 한다는데 왜 자꾸 미국이 한다고 하는가”라며 깡짜를 놓은 것이라면, 김정일은 “우리는 이미 핵을 갖고 있으니까 미국이 우리를 (핵보유국)상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바꾼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일의 한반도 비핵화 개념이 회담 관련국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게 되기는 힘들 것이다. 미국은 회담복귀의 전제조건을 거부해왔고, 일본 중국 러시아도 북한의 핵보유국 인정을 전제로 회담에 임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약하면 김정일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되지도 않을 말을 대전제로 깔고 NPT 복귀니, IAEA 사찰이니 하며 화려한 수사를 늘어놓은 것이다. 대전제가 거짓말이니 이어지는 말은 ‘종속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한반도 비핵화’는 김정일의 기묘한 선전전술 창고에 오랫동안 들어있던 것을 이번에 먼지 좀 털어내고 다시 선보인 것이다.
시작된 김정일의 회담 복귀쇼
그렇다면 김정일이 정장관에게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김정일의 노림수는 결국 6자회담이 북한에 좀더 유리하게 전개될 수 있도록 남한에 심부름을 한번 시켜보고, 남한내부에는 반미 여론을, 중국・러시아는 미국에 좀더 양보를 요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궁극적으로 북핵문제에 계속 시간을 벌며 부시 행정부의 임기를 넘겨보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그 사이 남한 내 반미여론이 비등해지도록 두고 보겠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미국과 좀더 협의해보고 6자회담 복귀 문제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7월 중에라도’의 표현에는 미국이 잘하면 복귀시한이 빨라지고, 그렇지 않다면 늦어지거나 복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동시에 갖고 있다. 김정일의 발언 대부분이 ‘미국이 어떻게 하면’이라는 전제를 달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7월이든, 그 이후든 북한이 6자 회담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궁극적으로 핵폐기를 위한 수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회담이 재개된다 하더라도 언제든 다시 회담장을 뛰쳐 나갈 수 있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주제는 회담장에서 말로써 시간을 때우고, ‘미국이 아직도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땡깡을 피우기 아주 좋은 테마다.
여하튼 북한의 6자 회담 복귀쇼는 김정일의 깜찍한 거짓말로 서막이 올랐다.
남은 것은 김정일의 거짓말이 어느 정도로 ‘정교하게’ 전개되느냐는 문제와, 남한 정부와 국민이 김정일의 거짓말을 어떤 시기에 비로소 정확히 깨닫느냐 하는 문제로 압축되고 있다.
손광주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