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교시문에도 빈대가 득실득실”

조선 경제범교화소 중의 하나인 ‘제12교화소’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청진 방향으로 30리쯤 떨어져 있는 ‘전거리’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10리쯤 산골짜기를 타고 올라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회령에서 청진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도로 좌측에 전거리가 있고 우측에는 풍산리가 자리하고 있다. 큰 길에서 전거리로 들어가면 기차가 다니는 철다리 밑을 거쳐야 하는데, 이곳이 전거리 입구다.

이 철다리 밑에서부터 약 1.5km 정도 치안대가 다니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차단초소(검문소, 차나 사람을 단속)가 있는데, 이 초소는 제12교화소 산하 경비대원들이 지키고 있다. 이 초소를 거쳐 빠른 걸음으로 30분쯤 걸어가면 제12교화소에 도착한다.

전거리에서 회령 쪽으로 30분가량 가면 조선인민군 경비대가 지키고 있는 초소가 있다. 이 초소에서는 유동인구의 신분증 및 여행증명서, 소지품 검사를 담당한다.

전거리 교화소는 수용인원이 약 2,000명 수준이다. 이 교화소에는 경비대 초병들까지 합쳐서 보안원만 약 300명 규모다.

이 중 직발입대초병(군대에 뽑혀 바로 전거리 교화소로 들어간 사람, 한국의 경비교도대와 같음) 60명, 가족과 함께 살림을 하는 30~35세 초병이 10여 명, 미혼인 ‘특사’ 계급 초병이 10여 명 정도 된다. 그 외 견장에 별을 달고 있는 보안원이 약 220여 명 정도 된다고 알려져 있다.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군대 초모(군인(초병) 모집)가 아닌 안전부 초모로 입대한 초병들 중에서 교화소 초병을 선발하는데, 한마디로 돈도 없고, 배경도 없는 집 자식들이 교화소 초병으로 선발된다. 교화소에서는 죄인뿐만 아니라 초병들도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늘 죄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죄인들을 따라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나무하러 산에 오르면 무조건 제일 꼭대기에 서 있어야 하고, 바지를 적시는 한이 있어도 용변을 참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배고프고 힘들더라도 그 무거운 무기장구류를 하루 종일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 초병은 무게 3.2kg짜리 68식 자동보총(소련제 AK 소총을 개량한 AK-68소총), 실탄을 채운 탄창 2개를 늘 소지한다. 때문에 교화소 초병들의 얼굴 표정은 마지못해 끌려 다니는 죄인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항상 얼굴에 짜증이 가득하고 피곤한 표정이었다.

제12교화소는 본소(本所) 건물 외에 본소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동정광(원광을 선광하여 동(銅)이 들어 있는 것만을 갈라낸 광석)을 캐내는 2과와 5과가 분소(分所)로 자리 잡고 있고, 본소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해발 1,000m 높이에 4과가 분소로 위치해 있다. 1과와 3과는 본소에 포함되어 있다. 흔히 본소를 ‘전거리 교화소’라 부른다.

전거리 교화소에는 교화소 소장을 우두머리로 그 밑에 부소장, 정치부장, 간부과장이 있고, 1~5과에는 과장, 비서급 보안원, 관리보안원 및 일반 보안원들이 있다. 귀동냥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전거리 교화소는 1970년대 말에 <제22호 청년교양소>라는 명칭으로 세워졌으며 그때는 교화소 콘크리트 담벽의 높이가 6m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에 <제12교화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콘크리트 담벽의 높이도 8m로 높아졌다. 지금도 전거리 교화소의 콘크리트 담벽은 20여 년 전에 추가로 쌓은 담벽의 모습이 선명하게 구분된다.

교화소 체계는 크게 1~5과로 분류되며 보안과, 교화과, 생산과, 재정과, 노동행정과, 간부과 등이 있다. 2과와 4과, 5과를 통솔하는 별도의 분소 소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본소와 2개의 분소에는 각각 죄인들을 관리하는 관리보안원, 과장, 비서들이 존재한다.

본소 콘크리트 담벽은 한 변이 약 120m 길이의 정사각형과 유사하며, 그 안에 감방, 창고, 낙후자 휴게실, 목공반, 설계반, 공무반, 구내반, 취사장, 벌목반, 병원, 약국, 상하차반(상차, 하차가 있고, 작업한 것을 싣고 부리는 일, 작업조 이름), 차수리반 등 반별 작업장들과 휴게실이 들어차 있다.

두 개 분소는 콘크리트 담벽이 아닌 철조망으로 둘러져 있으며 이 울타리 형태는 고압선으로 된 3m 높이의 전기 철조망을 중심으로 양쪽 3m 거리에 똑같은 높이의 가시철조망이 있어 총 폭이 6m의 3중 철조망이 자리하는 셈이다.

교화소 간부들의 가족 수는 대략 800~900여 명 규모이며, 극소수의 일반 사회인들이 본소를 중심으로 위로는 상동마을 12가구, 아래로는 차단초소에서 1.2km 거리에 위치한 하동마을 30여 가구 정도가 살았다.

중동마을은 교화소 담장 동서쪽으로 나뉘어 160여 가구가 살았다. 이렇게 제12교화소는 1개 본소, 2개 분소, 10여 개의 과로 나뉘어 죄인들을 관리하고 있다.

보안원들이 사용하는 시설을 제외한 죄인들 시설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다. 감방, 작업실, 휴게실은 말할 것도 없고 생활필수품과 위생시설은 아주 먼 옛날 갓 쓰고 당나귀 타고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입소했던 당시에는 죄인들의 감방이 짐승들 우리보다 못했다. 벽과 천장, 바닥은 모래와 나무톱밥의 비율을 3:1로 맞추어 석회가루 풀어놓은 물에 반죽해서 만든 것으로 발랐다. 조선에서는 이 반죽을 ‘사마로’라 하는데 시멘트 대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얼마 못 가 가루가 떨어진다.

그래서 죄인들은 식사시간마다 천장이나 벽에서 덩어리가 떨어져서 밥을 제대로 못 먹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신입자 시절에 국에 밥을 말아 먹다가 사마로 폭탄 세례를 맞은 적이 있었다. 밥을 국에 말지 않았으면 가루를 긁어내고 먹으면 그만인데 밥을 국에 말아버려 황당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하도 배가 고파서 톱밥과 모래가 섞인 밥을 훌훌 들이마셨다. 사마로가루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이, 빈대, 벼룩들이었다.

명절 휴식일에는 밝은 낮에 모든 감방 사람들이 함께 이잡이를 하는데, 이것들이 생존방식을 터득해서 우리가 옷을 벗어 손톱을 갖다 대면 옷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과 벽의 틈새로 숨어버렸다.

물론 밤이 되면 다시 사람의 몸 위로 기어올랐다. 시커먼 바닥은 대낮에 들여다보아도 숨어 있는 이들을 찾기 힘들었으며 명제카드(김정일의 교시를 적은 10장짜리 종이)나 준칙판 등은 죄다 빈대의 소굴이었다.

죄인들은 감방에 있는 동안 취침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열과 오를 맞추어 정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 정자세로 앉아 있는 자리가 곧 잠자리가 되었다. 반장들이 제구실을 못하는 감방에 가면 천장에 거미줄까지 늘어져 있어 그야말로 소 외양간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에 빈대, 이, 바퀴벌레, 모기가 1년 내내 득실거리니 차마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감방 안에는 변소가 달랑 하나 뿐인데, 항상 변 냄새가 가득 차있다.

그러나 교화소 생활이 오래되면 이 냄새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변 냄새를 느끼지 못하는 죄인일지라도 다른 냄새는 귀신같이 알아챈다.

가끔 감방 안에서 위생검열이 진행되는데 감방을 돌아보는 보안원들은 모두 인상을 찡그린 채 코를 싸쥐고는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상부에는 아주 깨끗한 환경조건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는 것이다.

죄인들에게서 나는 악취는 야외에서도 여전히 났다. 교화소 밖에서 가끔 마주치는 사회 사람들은 죄인들의 대열을 보면 고개를 돌리고 코부터 막는다.

반장들이나 극소수 깔끔한 죄인들은 그래도 열흘에 한 번 정도 옷을 빨아 입었지만 대다수 죄인들은 일 년 내내 입은 옷 그대로 잠을 자고 입은 옷 그대로 일을 했다. 그러니 냄새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천 명의 죄인이 수용되는 본소에는 50평방미터쯤 되는 세면장이 딱 하나있다. 세숫대야 같은 것은 없고 그냥 벽돌로 쌓아 시멘트를 바른 물탱크가 하나 있을 뿐이다. 거기서 물을 길어 세면을 할 수 있도록 반마다 나무욕조를 10개씩 만들어 세면장 한쪽 구석에 쌓아 놓고 사용하도록 했는데, 대충 못을 박아 만든 욕조라 물이 채워지지 않았고 다 새버렸다.

죄인 전체가 세면을 하려면 일단 물이 턱없이 부족하고 시간도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한 줄로 서서 세면장에 들어가면 각자 들고 있던 수건이나 천조각을 물탱크에 한 번 넣었다가 꺼내서 그것으로 얼굴과 손을 닦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꾸물거리거나 물탱크에 천을 두어 번 담그면 욕조 위에서 죄인들을 주시하는 세면장 관리의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왔다.

교화소에서는 인원수에 상관없이 교화반마다 1년에 이불 한 채, 분기마다 신발 7~12켤레, 솜옷과 내복 등을 지급한다. 그나마 이것도 담당 보안원들이 절반을 빼돌리니 죄인들의 옷과 신발 등 생필품 실태는 처참한 수준이다.

옷은 누덕누덕 기워 입고, 신발은 바닥이 다 닳아 발가락과 발뒤꿈치가 훤히 보인다. 가끔 보안원들 집에 농사일을 해주거나 집수리를 해주러 들어가 보면 집집마다 꿀을 채취하는 벌통이 있는데 그 벌통에 씌워지는 보온막은 모두 죄인들에게 지급됐어야 할 옷이나 이불을 찢어 만든 것이었다.

보안원들은 매일 죄인들의 옷차림과 신발 상태를 눈앞에서 보고 살았지만 죄인들에게 지급돼야 할 생필품들을 빼돌려 돼지굴, 개집, 벌통의 보온용으로 사용했다. 그들은 우리 죄인들을 자기 집 우리에 있는 개, 돼지보다 값어치 없는 존재로 생각했던 것이다.

감방에 전기 시설은 달랑 전구 하나였다. 그것마저 전압이 100V도 못 되니 전구 하나가 촛불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저녁식사 후 학습시간이 되면 눈이 다 침침해졌다.

겨울철이 되어 감방 통로에서 난로를 피우면 연기가 밖으로 빠지지 않고 감방 안으로 들어와 복도가 연기로 자욱했다. 그래서 밤마다 연기 때문에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고 콜록콜록 기침을 해가며 생활해야만 했다.

교화소에서 보안원들이 제일 욕심내는 보직은 보안과였다. 내가 교화소에서 생활할 때 보안과장 이름이 남병식이었는데, 당시 40대 후반에 165cm 정도의 체격을 갖고 있었다.

보안과장은 국가비밀 특수수사요원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교화소 소장도 이래라 저래라 함부로 못하는 존재였다. 나도 이 사람에게 세 번이나 취조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눈빛이 아직까지도 잊혀지 않는다.

평상시에는 아주 상냥하고 다정하게 죄인들을 대하지만 취조할 때는 감히 마주보기 힘든 위압감과 날카로움으로 죄인들을 압박했다. 또한 취조가 끝나면 다른 보안원들과 달리 아주 세심하게 애로사항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자유자재로 죄인들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캐내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보안과는 죄인들뿐만 아니라 담당 관리보안원과 교화소 내의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반당적인 행동이 조금이라도 포착되면 가차 없이 처벌했다. 때문에 보안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을 ‘게스타포’라고 부르며 보안과 간부들을 두려워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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