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美대통령 임기 막판에 꼭 ‘기회 놓치는’ 이유는?

북한이 26일경 중국에 공식 핵신고를 할 모양이다. 동시에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절차에 돌입하게 된다. 27, 28일 경에는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 쇼도 있을 예정이고, 이어 6자회담도 재개될 모양새다. 북핵문제가 뭔가 풀려갈 듯한 ‘무드’가 잡히고 있는 것이다.

원래 북한의 핵신고는 지난해 12월 31일이 마감일이었다. 북한은 6개월이나 핵신고를 미루며 미북 양자회동을 거듭하여 테러지원국 해제 약속을 확실히 끌어낸 것 같다. 일단은 북한의 지공(遲攻)전술이 임기 막판 외교적 업적을 바라는 라이스 국무부의 인내심을 일부 꺾은 게 아닌가 싶다.

라이스 국무장관은 18일(현지시각) 워싱턴 DC의 헤리티지 재단에서 미국의 對아시아 외교를 주제로 1시간 동안 연설했는데, 30분 가까이 북핵문제에 할애했다고 한다. 그는 조만간 부시 대통령이 의회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중단한 후, 45일간 북한의 협력 수준을 검증한 결과 불충분하다고 판단되면 적절한 대응을 할 것이라는 언급도 했다.

북한이 핵 신고를 하고 이를 검증하는 데 북한이 협조하지 않을 경우, 라이스의 복안은 테러지원국 해제 통보 후 발효되기까지 45일 동안 테러지원국 해제 절차를 무효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기간 중 미 의회는 부시 대통령에게 테러지원국 해제 결정에 반대하는 법안을 제출할 수 있다.

라이스 장관은 “북한의 과거 경력으로 볼 때 북한을 불신하는 것은 정당한 우려”라면서, 북한이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겠다고 한 합의를 지키지 않을 경우 중단돼 있는 대북 제재를 가하고 새로운 제재도 추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북한의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의 제거(elimination)를 확인하기 전에는 어떤 합의도 종결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지금부터 북핵문제의 주요 관전 포인트는 1)북한이 핵신고를 정확히 하는가? 2)미국과 IAEA 등이 신고된 내용을 검증하는 데 북한이 신의 성실의 원칙에 따라 협조할 것인가? 3) 3단계 과정에서 북한은 ‘모든 핵물질과 핵무기’를 폐기할 것인가? 등이다.

하지만 관련 6개국중에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진짜 믿는 외교관은 아마 없을 것이다. 북한의 핵신고 문제부터 플루토늄의 총량과 사용처, 완성 핵무기 등을 둘러싸고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논란이 될 것이다. 이미 6자회담 한·미·일 수석대표는 19일 도쿄회동에서 북한이 제출할 핵프로그램 신고서에 핵무기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지 않더라도 일정기간 내에 핵무기를 신고하는 것을 조건으로 수용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고 아사히 신문이 보도했다. 신문은 또 “3개국 수석대표는 향후 논의하게 될 비핵화 3단계에서 반드시 이를 신고한다는 약속을 북한측으로부터 받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고 전했다.

북한이 정확히 몇개의 핵무기를 갖고 있느냐는 문제는 초특급 기밀이다. 정확한 개수를 알만한 사람은 김정일 군 최고사령관(국방위원장, 당중앙군사위원장)과 중앙당 군수공업담당 비서(전병호), 제2자연과학원(국방과학원) 핵개발 실무책임자 정도에 불과할 것이고, 군 총참모장(김격식)과 작전국장(김명국) 등 일부 군부 핵심들도 대강만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김정일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김일성종합대와 김책공대에 핵관련 학과가 설치된 이후 길게는 40년 넘게 세계의 눈을 속여가며 북한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부어 어렵게 개발한 핵무기 특급 비밀을, 그까짓 기름(중유) 좀 받았다고 종이 한 장에다 ‘사실, 저희들이 지금까지 만든 핵폭탄은 몇 개인데요…’ 식으로 순진하게 신고할 가능성은 제로(0)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수차례 계속돼온 크리스토퍼 힐-김계관 양자회동에서도 ‘정확히 몇 개냐?’ 보다는, 오히려 ‘플루토늄 총량을 얼마만큼 신고하면 관련 5개국 -특히 미 의회, 행정부-이 믿어주겠느냐?’를 둘러싸고 골머리를 싸맸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애당초 흘러나온 플루토늄 30.7kg에서 얼마 전 외신보도에 나온 37kg으로 ‘재조정’된 게 아닌가 싶은데, 이 수치 역시 액면 그대로 믿긴 어려울 것이다.

핵전문가들은 북한의 플루토늄을 대략 45kg 주변으로 보고 있으며, 핵무기는 최소 5개~최대 10개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여기에서 ‘최소 5개’는 핵전문가들 외에 국제관계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 사이에도 ‘의미 있는 수치’로 보고 있다.

북한노동당 국제비서를 지낸 황장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수와 관련하여 “최소 5개 이상일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왜 5개 이상으로 보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황위원장은 “김정일의 핵위협 대상은 미국, 중국이 될 수 없고 결국 남한과 일본이 협박대상인데, 남한용으로는 2개, 그리고 3개의 큰 섬으로 되어 있는 일본용으로는 최소 3개 정도로 생각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또, 최근 황위원장은 “김정일이 결코 정확한 수치의 플루토늄을 신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긴, 정확한 플루토늄 양을 신고하면, 이를 근거로 군사전문가들이 북한의 핵전략을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되는데, 과연 김정일이 정확히 신고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부시 행정부가 아무리 임기말 외교적 업적에 급급해도 지난 93~94년의 1차 북핵위기 때처럼 또 한번 김정일에게 어물쩡 속아 넘어갈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라이스 장관은 헤리티지 재단 연설에서 “45일간의 검증의 목표는 북한에게 속지 않는 것”이라는 말했다. 또 지난 4월 방북한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KEI) 소장에게 북한측 인사가 “3단계 핵 폐기과정에서 핵물질과 핵무기가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데 대해, 라이스 장관은 “만약 북한이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3단계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부시 대통령은 “북한은 핵무기와 핵물질을 미국에 넘겨라”라며 넌-루거 방식의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북한과 중국은 28일경으로 예정된 영변 냉각탑 폭파쇼에 라이스 장관이 참석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정황을 보면 외견상 지금은 지난 2000년 10월 미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조명록 군 총정치국장이 미국을 방문하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여 미사일 협상을 잠정적으로 타결하고, 클린턴 대통령이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통해 김정일의 방미 요청을 하던 시기와 유사해 보이는 측면도 없진 않다. 북핵문제가 부시 행정부 막판에 뭔가 좀 풀려갈 것이라는 ‘무드’가 연출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번에도 미국의 희망대로 북핵문제가 잘 풀려나가지도 않을 것이고, 또 북한이 바라는 대로 되지도 않을 것으로 본다.

최근 몇년째 외부 활동을 중단한 듯한 미국의 오래된 한반도 전문가 로버트 매닝은 2003년경 “북한은 뭔가 할듯하면서도 막판에 꼭 기회를 놓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지난 5월 방한한 클린턴 시기 북핵담당 로버트 갈루치도 이같은 발언을 했다. 북한은 왜 좋은 기회가 왔는데도 막판에 놓치는 것일까?

필자는 김정일이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볼 때 ‘김정일이 기회를 놓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김정일은 핵무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 할지라도 실제 핵폐기와 바꾸는 것은 거래가 성사되기 어렵다. 외부에서 볼 때 ‘김정일은 왜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잡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김정일은 핵을 포기한 이후 자신의 독재정권 안전문제가 더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김정일은 미국이 자신의 정권 안전보장도 해주고, 핵무기도 용인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미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중국이 이를 용인할 수 있는가? 가능하지 않다. 외부에서 볼 때는 김정일이 핵만 포기하면 정말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김정일로서는 핵보유를 대체할 만한 조건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핵신고 이후 앞으로 45일간을 유심히 지켜 볼 필요가 있을 것같다. 핵신고-6자회담-검증의 과정을 거치면서 김정일은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숙원사업을 따내면서, 미국에게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핵무기, 핵물질을 절대 외부에 이전하지 않는다’라는, 언제라도 휴지로 만들 수 있는 문서를 한장 써주겠다는 얄팍한 계산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행동대 행동 방식’의 북핵해결 프로세스에서는 그게 쉬울 것 같진 않다. 만약 김정일이 그런 식의 계산을 한다면, 또한번 ‘북한이 미 대통령 임기 막판에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 될 것이다. 어쨌든 북한의 핵신고 이후 북핵문제는 새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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