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아리랑’과 히틀러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노무현-김정일 회담의 목표는 김정일의 전체주의 체제를 구명하고 연장하는 데에 있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방북하기 훨씬 전부터 노무현 정권은 북한체제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모든 금기를 버릴 수 있음을 시사해 왔다. 북한 어린이의 피와 눈물로 만들어진 체제선전극 ‘아리랑’ 관람의 이유도 북한체제를 인정한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방북 첫날 노대통령은 평양의 만수대의사당을 방문하여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고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내용적으로 볼 때 이 글귀보다 더 냉소적일 수 있는 글은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 없겠지만, 만일 진심으로 이런 글을 남겼다면 그 글쓴이와는 ‘북한체제와 관련하여’ 어떠한 정상적 대화도 불가능함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절멸수용소가 존재하는 지금의 북한을 “인민이 주권을 갖고 행복하게 사는 곳”으로 보는 자는 망상환자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사회의 지도급 인사들 가운데 편집증적 망상 환자가 다수 있음은 잘 알려진 의학적 사실이다).

특히 만수대의사당 방문일정은 사전에 확정된 것이고, 방명록에 남길 글도 미리 준비하였을 것이니, 결코 즉흥적인 발상이 아니다. 바꿔 말해 노대통령과 이재정 통일부 장관 등 한국의 친북좌파의 의식은 지속적 망상의 전형적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망상증은 반드시 체계화, 내면화 과정을 겪어서 의식에 고착되듯이 이들도 교묘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다. 그것이 건국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역사부정으로 나타나고 있음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뉘른베르크의 마지막 전당대회 슬로건은 ‘평화’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체계화되고 광범위한 배경 지식을 요하는 (망상적) 이론보다는 직접 눈에 보이는 것에 더 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것이 상징조작이다. 아마도 현재 한반도보다 더 상징조작이 큰 영향을 미치는 곳은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2일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음으로써 마치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은 듯한 착각을 주었다. 자갈치 아줌마와 눈물로 유권자의 감성에 호소하여 “재미를 좀 본” 사람으로서 능히 시도할 만한 이벤트다(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노대통령은 이번 남북회담을 통해서 지지율이 급등, 30%대로 다시 진입했다고 한다).

노대통령이 군사분계선에서 줄타기(Seiltanz)를 한 바로 다음날인 10월 3일 6자회담의 북핵 불능화 합의문에는 북한의 핵무기도, 플루토늄도, 농축우라늄도 또 구체적인 불능화 이행방법도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채 어물쩍 넘어갔다. 그 원인에 대해 연합뉴스는 “합의문 도출에 실패했을 경우 남북 정상회담에 악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리 측 입장 등을 감안, 합의문의 구체성을 어느 정도 양보하고라도 서둘러 합의를 도출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언급하고 있다.

상징조작은 무능한 정권이나 체제가 국민기망을 위해 헛바람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이번 노무현-김정일 회담이 한국의 평화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사실로써 드러난 것이다.

북한의 체제선전극 ‘아리랑’도 상징조작의 한 유형으로서, 이미 그 선례는 히틀러가 매년 뉘른베르크에서 가을에 벌였던 전당대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감독 리벤슈탈에 의해 극적으로 촬영되어 그 기록이 남아 있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규모는 김정일의 ‘아리랑’을 훨씬 넘는 규모였다. 참고로 1938년 뉘른베르크의 마지막 전당대회의 슬로건이 ‘평화’였고 그 다음해에 히틀러는 전쟁을 시작했다.

“체제 인정한다”는 정확한 어법 요구

남과 북이 호흡을 맞추어 쏟아 붓는 상징조작은 일단 그 지향점은 평화, 경제협력, 통일 등으로 포장된다. 이 모든 슬로건은 대단히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듯이 보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전쟁광” “괴물”이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

또한 평화, 경제협력, 통일은 모두 상대방의 존재를 전제하는 개념이므로 당연히 북한체제의 존재 및 안정을 자동적으로 요구하는 듯이 보이며, 노대통령이 만찬에서 “북한체제의 안정을 위해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을 위하여”라는 건배사를 하였다고 전해지는 것도 실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노대통령에게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거덜 난 김정일 체제의 안정적 유지이며, 합의문의 내용도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쓰더라도 전체주의 북한 체제의 구명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북한체제에 대한 친북좌파의 집요한 분식(粉飾)행위가 개입된다. 즉 친북좌파들은 남과 북이 ‘사이가 틀어진’ 이웃들, 혹은 친척들, 혹은 형제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 어떤 짓을 했고 또 지금 하고 있는지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오로지 이웃, 친척, 형제들 간의 화목이며 이른바 “우리민족끼리”가 바로 그것이다.

특별히 못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양보해서 지금은 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틀어진 형제들 간에 우애를 회복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증거인 절멸수용소를 현재 운영하는, ‘아리랑’ 보다 우선적으로 기네스북에 올라야 했던 부자세습의 북한판 봉건적 파시즘 “체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어법을 요구한다.

즉 북한인민의 삶과 인권을 위해서는 그 통제자인 김정일 체제와의 대화가 불가피하다는 의미에서만 ‘북한체제의 인정’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지, “인민이 주권을 갖고 행복하게 사는 곳”으로서 북한체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그러나 평화, 경제협력, 통일 모두는 이제 불과 2달 후면 사실상 소멸될 노무현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평화로운 통일을, 그리고 시장경제를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논리적으로 수령독재, 봉건세습파시즘인 ‘북한 체제의 소멸을 전제’하는 것이다.

한국의 친북좌파와 김정일 정권의 공통점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상징조작이며, 그것은 이들 정권 혹은 체제유지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아리랑’ 창작을 명한 김정일을 위대한 “음악정치가”라고 노동신문은 전하고 있지만, 역시 그 선례는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Meistersinger)를 40만명을 수용하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장에서 서치라이트에 의한 빛의 쇼와 함께 연출한 히틀러였다.

만고불변의 진리, 죽음의 빛깔은 피부에…

그러나 천년왕국을 예언한 히틀러의 대형 체제선전극이나 김일성민족의 불멸의 미래를 외치는 ‘아리랑’이나 실은 똑같은 인간적 어리석음의 변형들에 불과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권력과 영생에 대한 허영이다. 굳이 역사가나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권력과 삶이 무상함은 만고의 진리로서 상징조작의 끝도 결국은 죽음으로 끝이 나기 마련이다.

며칠 전 필자에게 한 생물학 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원시시대에 한눈에 타인을 알아보는 방법은 상대방의 피부를 보는 것이었다.”

TV를 통해 전해진 김정일의 얼굴은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병색이 완연하고 초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원시시대에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후반과정에서 보이는 피부의 역할이다. 김정일이 부정하고 싶어도 병과 죽음의 그늘이 그의 얼굴에 깊이 덮여 있었음은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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