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불합리주의’ 전략과 ‘론도 변주곡’

김정일은 속임수에 능하다.

‘속임수’라고 해서 무슨 거짓말이나 사기를 잘 친다는 뜻이 아니다. 속임수란 전략전술(병법)에서 궤도(詭道)의 의미이다. 손자병법의 손무(孫武)는 ‘병은 궤도이다'(兵者, 詭道也) 즉 ‘전쟁이란 속임수’라고 했다. 김정일이 이런 종류의 속임수에 제법 능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대남, 대미, 대일 전략에서 속임수를 잘 쓴다는 이야기다.

김정일은 부하들에게 ‘적들이 우리를 모르도록 안개속에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94년 제네바 합의 때부터 그런 말을 자주 해왔다. 당시 미국과 맞상대하여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보이지 않는 손’은 김일성이 아니라 김정일이었다.

손자병법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적을 모르고 나를 알기만 한다면 이기고 질 확률은 절반이 되며, 적도 모르고 나 자신도 모른다면 싸울 때마다 위험에 빠지게 된다'(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不殆)고 했다.

김정일이 부하들에게 하는 주문은, 말하자면 ‘나는 적을 알고 적은 나를 모르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정일이 손자병법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다만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은 자주 읽었다고 한다. 또 김정일을 가르친 황장엽 전 노동당 사상담당 비서는 “김정일이 변증법은 어려워서 못 배우겠다고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변증법을 쉽고 즐겁게 공부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만, 특히 김정일은 성격상 문사철(문학 사학 철학)이나 수학, 물리학 같은 기초학문을 진득하게 파고드는 유형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김정일이 손자병법을 잘 알든 모르든 전략전술을 중시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또 실제로 김정일은 상당히 전략적 유형의 인간으로 볼 수 있다.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의 북한 전문가인 다케사다 히데시는 “남한에 비해 북한이 더 전략적 마인드를 갖고 있다”고 저서 ‘두려운 전략가 김정일’에서 제3자 입장에서 남북관계 관전평을 하기도 했다.

북한의 전략은 ‘협상’에 유리

94년 제네바 합의를 계기로 김정일은 스스로 ‘외교의 천재’로 자부했다.

제네바 합의에서 한국, 미국, 일본 등은 경수로 2기를 지어주고 완공 때까지 매년 중유 50만톤을 제공하기로 했다. 반면 북한은 ‘NPT 체제에 잔류하고 핵개발을 동결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약속’을 해주었다. 이 ‘약속’이란 것도 NPT-IAEA 체제에서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려면 어느 나라든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사항에 불과하다. 게다가 제네바 합의는 ‘북한은 앞으로 절대 핵개발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현 상태에서)핵개발을 동결한다’였다. 현실적으로 ‘영변 핵시설 임시가동 중단’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김정일은 미국을 상대로 3년여를 밀고 당기며 ‘영변 폭격론’에 ‘서울 불바다’ 등으로 대응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을 최고치로 끌어올렸다가 최소치의 ‘립 서비스’만 해주고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냈으니, 스스로 ‘외교의 천재’라 자화자찬할 만도 한 것이다.

당시 한국 미국 등 외부세계는 ‘북한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북한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한반도에 전쟁이 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북한 인식은 제네바 합의후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북한에 대한 이같은 고정된 인식은 김정일이 전략전술을 펼치는 데 매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준다. 상대방에게 ‘나는 매우 위험한 인물’임을 인식시켜놓고 협상하는 경우와, 상대에게 ‘나는 매우 합리적 인물’임을 밝혀놓고 협상하는 경우, 전자(前者)가 유리하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다.

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대소련 전략을 수행하면서 ‘레이건은 매우 위험한 카우보이’임을 크레믈린에 인식시키는 사전 작업을 많이 했다. 당시 CIA(중앙정보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빌 케이시 국장은 어느날 느닷없이 레이더에 안 잡히는 스텔스기를 소련-유럽 국경 상공에 비행시키는 등 크레믈린에 ‘레이건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피터 시바이처- ‘냉전에서 경제전으로’). 이것을 김정일식 표현대로 하자면 ‘적들이 우리를 모르도록 안개속에 있는 것처럼’이 될 것이다.

레이건 정부는 대소련 전략에서 월등히 우세한 경제력을 활용하여 소련을 군비증강에 헉헉 대도록 만들면서 소련의 경제력을 소진시켜버렸다. 그 결과 그전에 이미 중국과는 수교를 통해 중국의 개혁개방을 유도해낸 상태에서 소련마저 체제를 전환시키고 전지구적 자유민주주의와 공산독재의 대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것이 열전(Hot War)전략이 아닌 냉전(Cold War)전략의 승리인 것이다.

김일성-김정일 정권은 지난 50여년 동안 외부세계가 ‘북한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집단’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행동해왔다. 즉 북한 스스로 그런 이미지 메이킹을 해온 측면이 있는 것이다. 특히 제네바 합의 당시 김정일은 외교부 강석주 제1부부장에게 ‘한번 밀리면 끝까지 밀린다’ ‘외교는 고자세 외교가 최고’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것이 ‘벼랑끝 전술’이다.

이후 북한은 6자회담을 비롯해서 각종 남북회담에서 제멋대로 하는 것을 당연시해왔고, 주변국은 북한을 회담장으로 다시 불러내는 데 골머리를 싸매왔다. 북한의 이러한 전략전술을 속임수(詭道) 차원에서 본다면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한은 북한과의 협상에서 5대 5 정도가 되면 엄청나게 수확을 거둔 것처럼 되어 버렸다. 김대중 정부 이후 남한은 실컷 경제지원을 해주고도 ‘남북관계의 모멘텀을 이어가면 다행’이라는 식의 ‘협상 패배주의’가 계속되었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는데도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북관계 모멘텀’ 운운 했으니, 도대체 무엇을 위한 남북관계 모멘텀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 스스로 빠져 버렸다.

즉, 나 자신도 모르고 상대방도 모르는, 그래서 협상 때마다 깨지고 얻어터지는, 실컷 퍼주고도 ‘선군정치 덕에 남한이 안전하게 산다’는 머리 어루만짐을 당하는, 그래서 어느새 남한정부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북의 ‘관행’에 순치(馴致)되어 버린 것이다.

김정일의 핵보유, 목적이자 수단

김정일의 핵전략에 대한 인식도 이와 비슷하다.

김정일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어야 1) 무엇보다 자신의 정권을 지킬 수 있으며, 즉 최악의 경우에도 이라크의 후세인 꼬락서니를 당하지 않을 수 있으며 2) 장군님의 권위를 유지하며 군부를 끌고 갈 수 있으며, 즉 선군정치를 유지할 수 있고 3) 한반도와 동북아에 군사적 긴장을 유발해서 협상을 하든, 무엇을 하든 살길이 생기며 4) 따라서 김정일은 핵무기든, 핵물질이든 갖고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김정일에게 핵보유는 체제생존의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다.

김정일은 핵이 자신의 손에서 완전히 떠나는 순간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고 본다. 핵무기를 포기한 후 김정일에게는 두 가지 길이 남는다. 하나는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해 중국처럼 성공하는 경우, 나머지 하나는 개혁개방에 실패해서 정권을 내주게 되거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에 ‘먹히는’ 경우이다. 설사 개혁개방 연착륙에 성공한다 해도 김정일 패밀리가 계속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김정일에게는 둘 다 안 좋거나 불안한 카드인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로서는 핵무기를 완전히 폐기하는 길로 가는 것은 모험일 뿐이다. 그런 모험을 하느니 핵무기를 보유하면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즉 긴장유발-협상-경제지원-새로운 형태의 긴장유발-협상-경제지원의 ‘론도(rondo) 변주곡’으로 생존하는 것이 안전한 것이다. 또 이러한 방식이 ‘북한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집단’이라는 고정관념을 주변국에 계속 인식시키는 데 유리하다. 이 전략전술은 남한, 일본, 미국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핵실험국이 된 만큼 김정일은 특히 대남 전략에서 핵인질 효과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다양한 전술을 새롭게 시도해볼 수도 있다. 앞으로 더 면밀히 관찰해야겠지만 우선 그 전술의 두 축은 ‘평화모드’와 ‘협박모드’이며, 이 두 가지를 시차를 두고 이익이 되는 쪽으로 번갈아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북이 핵무기를 보유한 것이 기정사실화 된 만큼 ‘협박 모드’는 남한, 일본 사람들에게 더욱 진하게 피부에 와닿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지난해 지하 핵실험은 ‘협박모드’로는 상당히 고단위 처방이었다. 아울러 핵무기를 갖고 있으면 협박모드에서 평화모드로 극적으로 전환할 경우 평화모드의 효과 역시 더 크게 높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의 핵전략에 대한 외부세계의 인식은 ‘미국이 유연하게 대해주면 북한은 핵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장관까지 지낸 어느 분이 최근 세미나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은 궤변”이라는 ‘진짜 궤변’을 내놓았다. 김일성-김정일도 그렇게 말해왔다. 미국이 침공하지 않으면 우리는 핵을 가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90년 1차 북핵 문제가 불거진 지도 벌써 17년이 됐다. 그 사이 북은 온갖 전략전술을 다 동원하여 끝내 핵실험국이 되었다.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에 이어 8번째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동시에 우리는 지난 17년 동안 북한의 핵관련 속임수 발언에도 순치(馴致)돼 왔다. 전 통일부장관의 말에서 그 순치의 전형(典形)을 보게 된다. 김정일 입장에서 볼 때는 참으로 귀엽고 갸륵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장관 개인의 순치가 아니라, 장관의 그런 ‘정통파 궤변’이 남한 내부까지 속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치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는 것이다.

미국은 합리주의, 김정일은 ‘불합리주의’

6월 30일 베이징 서우두 공항에서 최근 북한에 다녀온 올리 헤이노넨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차장은 영변 핵시설 폐쇄 봉인을 검증하는 방식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김정일은 일단은 ‘평화모드’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영변 핵시설을 폐쇄 봉인하는 데까지는 잘 갈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2.13 합의문 5개 워킹 그룹 가동과 6개국 외무장관 회담까지 ‘화려한 말의 성찬’을 보이며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구나 짐작하듯, 문제는 HEU 등 핵프로그램 목록과 핵시설 불능화이다. 미 국무부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올해까지 불능화가 가능하고 내년에는 북한의 핵무기를 폐기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같은 힐의 전망은 ‘합리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합리주의란 ‘우리는 너희들이 요구한 것을 해결하고 해야할 바를 다했으니, 이제 북한도 해야할 바를 해라’는 것이 핵심이다.

반면 북한의 전략은 ‘불합리주의’에 기초해 있다. 즉 합의문이나 약속 등에 얽매이지 않고 그때그때 유리한 방식으로 미련없이 가버리는 것이다. 즉 ‘당신들이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합리주의를 계속 하는 것이다. 북한은 그러한 불합리주의를 ‘불합리’로 보지 않고, 이익의 관철로 본다.

‘불능화’의 의미도 2.13 합의 직후 조선중앙통신이 ‘핵시설 가동 임시중지’로 발표했듯이, 북한은 이 표현에서 안 물러설 가능성이 있다. 즉, HEU 문제에서 미-북 양국은 ‘투명 신고’ 對 ‘새로운 증거 요구’의 공방을 벌이고, 불능화 對 ‘핵시설 가동 임시중지’ 및 경수로 요구의 공방이 지루하게 반복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북한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협상이 전개되지 않으면 새로운 긴장유발을 하거나 서해 NLL 문제를 남북간에 정식 의제(Agenda)화 할 것을 더욱 강력히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사이에 미북 연락대표부 설치, 미북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협정 등 실제로 행동에 옮겨지지는 않으면서 ‘말’만 무성한 현상이 초래될 수 있고, 이같은 ‘평화 거품현상’이 마치 실현될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직 통일부장관의 ‘명품 궤변’이 대중의 힘을 얻을 수 있고, 그만큼 더 ‘남한은 주무르는 대상’이 되어가고 김정일의 궤도(詭道)도 빛을 발하게 된다.

이 잘못된 구조를 깨뜨리는 핵심 전략은 김정일로 하여금 끊임없이 북한 내부문제에 몰두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 김정일이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체제생존과 절대권력 유지에 누수현상이 발생하도록 만들면서 김정일이 이 문제를 수습하는 데 힘을 소진시키는 쪽으로 전략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핵문제 등 대외관계는 북한이 합리주의로 따라오면 이익을 주고, 불합리주의 행태를 보일 경우 금융제재와 같이 분명한 손해를 주면서 북한을 ‘정상국가화’로 몰고 나가야 한다. 북한의 정상국가화란 곧 북한 행태의 합리주의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대북 주도권을 잡으려면 우리가 능동적 위치를 점해야 한다. 김대중 이후 지금까지 거꾸로 북한이 대남 능동적 위치를 고수했다. 그러니까 늘 지원을 해주고 뺨을 맞는 것이다. 이 위치를 이제 바꿔야 한다.

문제는 아직도 뺨을 맞으면서도 우리가 마치 대북 능동적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남북정상회담도 구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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