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대공세는 시작되었다

김정일과 정동영 장관의 면담내용이 후속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정장관은 20일 김정일과의 면담 내용중 17일 기자 브리핑에서 빠뜨린 게 있다며 “김위원장은 미국과 수교하면 장거리 미사일을 전량 폐기하겠다고 말했다”며 비공개 내용 일부를 언급했다.

또 경의선 우선 개통, 금강산 관광 활성화를 위한 남북교류협력법 개정 언급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는 “김위원장이 박정희 전대통령의 독재에 관한 언급은 없었고 좋은 이야기만 했다”는 후일담도 들려줬다.

야당은 김정일과의 면담 내용을 왜 속 시원히 밝히지 않고 양파 까듯 하나씩 새로운 이야기를 내놓느냐며 정장관을 추궁하는 모습이다.

희한한 광경이다. 정치인들이 김정일과의 밀담이 무슨 보물 보따리나 되는 것처럼 꺼내 보려고 안달이다.

정장관이 김정일과의 면담내용을 브리핑하던 장면이나, 최근 하루 이틀 사이의 언행을 보면 마치 처음 대특종을 때린 ‘입사 5년차 기자’처럼 들떠 있는 것 같다. ‘김위원장이 이런 말도 하고 저런 말도 했다. 어때? 나 확실히 한건 했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한심한 일이다. 정장관은 자신을 아직도 MBC 보도국 기자로 착각하는가.

정치인 김정일과 인간 김정일, 분리해서 사고해야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인들은 김정일을 한번 ‘알현’(謁見)하는 것이 무슨 ‘별’을 하나 더 달게 된 것처럼 대단한 정치경력이 되어 버렸다. DJ부터가 그랬다. 박근혜 대표라고 다르지도 않다. 김정일을 만나고 돌아온 정동영 장관은 얼굴까지 상기돼 있었다.

김정일을 한번 만나고 온 사람들은 예의바른 사람, 이야기가 되는 사람, 외부정보에도 아주 밝은 사람, 시원시원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 등등의 찬사를 늘어놓는다.

김정일에 대한 이들의 인상비평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김정일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그런 인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문제는 한 두 번 만나고 와서 마치 김정일과 북한을 다 파악한 것처럼 왜 그렇게 체신머리 없이 행동하느냐는 것이다.

김정일 개인에 대한 인상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북한의 핵무기를 없애고 하루라도 빨리 개혁개방 되어 인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오늘날 북한문제의 본질 아닌가.

그런데 정치인들이 대체 시야를 어디에 두고 김정일이 시원시원하다느니, 결단력 있다느니 하는 주변적인 것에만 신경 쓰는가 말이다.

필자는 정부산하 연구소에서 6년간 김정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김정일을 잘 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적어도 정치인 김정일과 인간 김정일을 분리해서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 사전에 북한에 대한 나름의 공부가 있고 난 다음에 비판을 하든, ‘金비어천가’를 부르든 해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이 ‘김정일의 북한’을 파악하는 기본 아닌가. 그런데 지금 정장관의 행태는 도대체 무엇인가?

민족공조에서 반미공조로…. 북핵문제 해결은 어려워져

김정일이 그렇게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면 정장관은 왜 북한이 ‘시원시원하게’ 개혁개방으로 못 간다고 생각하는가. 북한인민들이 중국 사람들보다 못나서 계속 주린 배를 틀어쥐고 있는건가.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가. 북한인민인가, 김정일인가?

왜 근본문제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정치인들이 순간의 감정에 몸둘 바를 모르는가.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그것도 차기 대권후보라는 사람들이 말이다.

필자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게 “김정일이 만약 남한 TV 토론에 나와 우리 정치인과 논쟁을 벌이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황 전비서는 “아마 더 잘 할 거야”라고 자르듯 말했다.

황 전비서는 김정일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40년 넘게 가르치고 지도해준 사람이다. 아마도 김정일에 대해서는 가장 많이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남한에 와서 “김정일은 거짓말을 밥먹듯 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 지난 달 북한 핵실험 준비설이 언론에 나오자 황 전비서는 “북한이 6자 회담에 곧 돌아올 것”이라고 장담하듯 말했다. 지금 그 형국으로 가고 있다.

김정일은 모자란 사람이 아니다. 70년대 초에 지금의 독재체제를 직접 설계한 장본인이고, 무려 30년 이상 북한의 독재체제에 누수 없이 통치해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정장관 앞에서 무엇 때문에 속셈을 다 까놓고 말하겠는가. 정장관은 진짜 김정일이 핵무기를 없애고 사찰을 받아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할 것이라고 믿는가?

북한, ‘우리민족끼리’ 노선 고수하며 남한 압박

김정일은 정장관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데리고 논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한반도 비핵화’ 발언부터 ‘사찰 받을 테니 와서 봐라’는 말까지 김정일은 철저히 거짓말로 시작해서 거짓말로 끝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미국 탓으로 돌렸다.

정장관은 공식적인 기자 브리핑 자리에서 김정일을 ‘시원시원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라고 했다. 한마디로 김정일의 말을 그대로 믿겠다는 뜻 아닌가.

대한민국 통일부 수장이 그런 인식을 갖고 있는 한, 6자회담 구도를 미 일 對 남 북 중 러의 2대 4로 바꾸고 유엔안보리까지 끄덕도 않고 가면서 핵보유를 공식 인정받겠다는 김정일의 전략에 이미 말려든 것이다.

북한은 앞으로 ‘우리민족끼리’ 노선을 철저히 고수하면서 남한정부를 압박해 들어올 것이다. 그 결과 남한 내 반미여론과 민족정서는 파고가 더 높아질 것이다. 8월 15일 이산가족 상봉장면이 TV에 나오면 민족정서는 최고조에 오를 것이다.

그 반면 ‘우리민족끼리’가 강조될수록 국제공조를 해야 풀리는 북핵문제는 더 멀어져 갈 것이다. 남북공조가 강화될수록 6자 회담 내에서도 북한의 핵폐기라는 본질은 갈수록 흐려질 것이다.

21일 반기문 외교부 장관은 북한이 6자 회담에 돌아올 수 있도록 북한을 자극하지 말고 관련국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각국이 나름의 전략을 갖고 있는 터에 우방국들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반장관의 발언에서 민족공조에서 남북 ‘반미공조’로 가는 어두운 그림자가 엿보이는 것은 괜한 걱정일까.

김정일, 차기 대선 좌지우지 해보려고 시도

김정일의 공세는 이미 시작되었다. 스타트 라인은 정장관과의 면담이다. 오늘 개막한 장관급 회담부터 앞으로 전개될 모든 상황을 김정일은 평양에서 팔짱 끼고 지켜볼 것이다.

정동영 장관은 평양에서 내려다 볼 김정일의 모습이 자꾸 머리 속에 그려질 것이다. 그런 정장관의 모습을 꿰뚫어보면서 김정일은 차기 대권주자 한명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남한 정치인들이 김정일의 관심 안에 들어가려고 애를 태울수록 차기 대선에 김정일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럴수록 한반도의 미래에 주름살도 깊어질 것이다.

손광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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