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황장엽을 민족배신자라 말했지만…

탈북자들에게는 한 밤의 등대 같았고, 북한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큰 산과도 같았던 황장엽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년이 됐다.


생전에 황 선생을 볼 때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각오하고 한국에 왔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필자가 북한을 탈출하기까지 고민했던 것을 비추어 보면 황 선생이 망명할 때 심경이 어땠을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우리 일반 백성들이야 내 한 몸과 가족을 데리고 떠나면 되지만 황 선생은 아내와 아들딸뿐만 아니라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 그리고 시쳇말로 사둔의 팔촌까지 삶의 벼랑으로 몰려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황 선생이 망명한 이후 북한에서는 황 씨 성을 가진 사람은 제대로 처신도 하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황 선생의 망명은 북한에서도 일대 사건이었다. 북한 통치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이 북한을 떠나자 사상강국을 앞세우던 북한 당국도 입장이 난처해졌다. 북한 당국은 황 선생을 배신자로 취급했지만 우리 일반 백성들도 여러 의구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북한 주민들은 중앙당 비서면 생활상 애로도 없을 것인데 왜 망명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많이들 가졌다. 나라가 희망이 없으니 그런 사람도 떠난 것 아니겠냐고 말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이런 말들은 10대 청소년들에게 퍼져 나갔다.


또한 김일성이 살았을 때에 애국자로 불릴 정도로 나라에 충성을 한 사람이 망명을 한 이유는 김정일과 큰 갈등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 끼리끼리 모여 말을 했다. 일부에서는 북한 당국의 선전대로 무슨 큰 죄를 진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북한 당국은 “황장엽은 출신성분으로 볼 때 혁명 투쟁의 대상으로 규정한 ‘대지주’ 집안의 출신이지만 양심적 지주 집안으로 분류되어 숙청되지 않고 수령님(김일성)과 노동당의 인덕(人德)정치로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와 국가의 주요직에서 일했다”며 김일성의 은혜를 강조했다.


“그러나 1997년, 수령님이 서거하고 장군님(김정일)이 나라의 운명을 한 몸에 걸머쥐고 사회주의를 지키느라 애쓰는데 황장엽은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나라를 배반하고 일가족까지 모두 버린 채 도망친 민족반역자이다”라고 선전했다. 그러면서 당, 군, 행정, 근로단체, 대학,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신념의 붉은기를 지키자고 강조했다.


한국에 와서 황 선생이 쓴 회고록을 보니 이런 대목이 나온다.


“수백만 인민을 굶겨죽이고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빼앗아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든 사람을 어떻게 인민의 지도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고민하고 고민하던 끝에 결국 우리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좀 더 넓은 범위에서 협의 할 생각으로 북을 떠나 남쪽 동포들과 협의해 보기로 결심했다”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그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데도 눈 하나 까딱 않는 지도자에게 얼마나 절망했을지, 또 무기력한 자신을 자책했을지 알 수 있었다.


남한 사람들은 굶어 죽은 사람을 트럭으로 실어 날라 한 곳에 다섯 명씩 씨 뿌리듯 사람을 묻던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탈북자들은 그런 상황을 겪었기 때문에 황 선생이 수많은 희생을 무릅쓰고도 망명을 선택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김정일의 독재로 굶주림과 인권유린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을 구하겠다는 결심으로 탈북한 황 선생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이제 막 북한민주화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할 때 세상을 떠난 게 안타깝기 그지없다.


황선생의 서거는 북한 민주화의 커다란 손실이자 탈북자들에게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주었다.  하지만 아픔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한국 사회에 씩씩하게 적응하고 북한 민주화에 힘을 보태는 것이 우리 남은자들의 임무일 것이다.  


황 선생이 망명 당시 아내에게 보낸 글이 있다. “나 개인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며, 한 민족의 생명보다는 전 인류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내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는 글귀가 계속 가슴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