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 9.19 6자회담 공동성명 합의

9월 19일 6자회담 공동성명 발표 후 한 달하고도 열흘이 지나가고 있다. 지금쯤 한반도 정세를 한번 내려다 볼 때가 된 것 같다.

9. 19 공동성명을 계기로 김정일은 90년대 중반 이후 10여년 동안 자신의 머리를 짓눌렀던 국내외 정세를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유리하게 가져갔다.

10월 19일 김정일의 ‘비공식 대변인’으로 자처하는 재일교포 김명철 박사는 “9. 19 공동성명은 김정일위원장 핵전략의 외교적 한판승(diplomatic coup)”이라고 표현했다. 김정일이 외교적으로 미국을 ‘한방 먹였다’(coup)는 것이다.

일본에서 ‘조미 평화센터’를 운영하는 그는 그동안 김정일의 핵전략에 대해 꾸준히 발언해왔다. 일부에서는 그를 과장된 어법을 사용하는 김정일의 주변 인사로 보는 시각이 많다. 실제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그의 발언은 꽤 주목할 만하다.

특히 9. 19 공동성명 중 ‘미국은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는 문구는 김정일 입장에서는 크게 한시름 놓은 오아시스나 다름없을 것이다.

사용가능한 모든 옵션에서 군사적 수단 배제돼

공동성명이 국제 조약(treaty)보다는 구속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간 합의, 또는 다자간 합의에서 ‘핵무기나 또는 재래식 무기로..’라는 표현처럼 구체적으로 의무조항을 명기한 사례는 찾기 쉽지 않다.

다자간 공동성명이라면 그저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확인하였다’ 정도로만 해도 충분할 것을 구체적인 사용무기까지 적시해놓은 것이다. 이를 과거 봉건시대에 대입해보면 ‘美나라는 朝나라를 포차나, 화살로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식으로 강화조약을 맺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물론 그동안 미국은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원칙을 여러 차례 천명해왔다. 그런 한편 북핵문제 해결에서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는 표현도 써왔다. 모든 옵션 중에 비록 직접적인 군사공격은 아닐지라도 군사적 봉쇄와 같은 수단을 배후에 깔아두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왔다.

그러나 공동성명에 군사적 방안 배제가 구체적으로 명기됨으로써 향후 미국이 군사적 방안을 배후적으로 사용하더라도 북한은 미국이 약속을 어겼다는 공격의 여지를 열어 놓았다.

김명철 박사는 “앞으로 미국은 남한을 드나드는 군함과 전투기에 어떠한 핵무기도 없다는 점과 함께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미국이 2003년까지 제공하기 돼 있던 2기의 경수로를 제공하지 않는 한 북한은 IAEA와 NPT 복귀, 핵무기 및 핵프로그램 폐기에 나설 이유가 없다”고 못박았다.

북한은 외부로부터의 체제안전 보장 단초 확고히 해

또 한편 그는 “미국을 포함한 다른 회담 참가국들이 공동성명 이행에 나서지 않는 한 북한은 핵무기고를 자유롭게 늘일 수 있다”고 말했다. 즉 경수로 2기를 먼저 제공하지 않으면 ‘미국이 공동성명을 이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북한도 자위적 차원에서 핵무기고를 늘일 수 있다’는 논리다.

더욱이 미국을 비롯한 남한 중국 일본 등은 이미 상식적인 국제관계의 룰을 충실히 지켜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동안 북한의 관행을 보면 국제관계를 깨뜨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다. 북한은 문구 정도에 구속될 나라가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9. 19 공동성명으로 김정일의 핵전략이 ‘미국을 한방 먹였다’는 표현은 정확한 셈이다. 또 김정일은 10여년 동안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외부로부터 체제안전 보장의 단초를 확고히 해둔 셈이다.

그렇다면 김정일의 향후 행보는 어떻게 될까?

첫째는 집안 단속이다. 10여년 동안 내부 사정이 복잡했던 만큼 김정일은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 노선을 철저히 지키면서 선군노선으로 내부 단속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10월부터 재개된 배급제와 감시 통제 강화정책이다. 당창건 60돌을 기점으로 재개된 배급제가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김정일이 집안을 추스르는 방안 중 매우 중요한 정책임에는 틀림없다.

두 번째는 이른바 ‘민족공조’ 노선을 강화하여 남한을 미국, 일본과 더욱 멀어지게 만드는 동시에 내부 경제를 복구시키는 일이다. 북한의 기간산업은 에너지와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구축하지 않는 한 단기적으론 회복이 어렵다. 김정일은 이 문제를 중국을 통해 해결하려 하고 있다. 최근 북-중 관계가 경제분야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남한보다 중국이 체제충격이 덜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북, 남한의 ‘순살 경제’ 뜯어먹기 주력

그러면 김정일 입장에서 남한은 무엇을 도와주면 좋을까. 그것은 현금과 쌀, 비료 등 소비재 중심의 현물이다. 기간산업은 중국과 손잡고 경공업과 소비재는 남한을 이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남한의 ‘순살 경제’ 뜯어먹기다. 여기에 경수로 문제를 계속 물고 늘어지면서 남한의 전력지원을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받아내는 것이다.

현금은 남한기업을 경쟁시켜 관광사업을 확대하든가, ‘현대’에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조건으로 새롭게 현금을 확보하는 두 가지 방법을 염두에 둘 수 있다. DJ정부 시기 정상회담을 갈망하는 남한정부를 활용하여 기업을 통한 ‘합법적인’ 방법으로 현금을 확보해본 성공전례가 있기 때문에 그 손쉬운 방법을 김정일로서는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최근 남북정상회담 논의는 연방-연합제 논의와 같은 정치적 접근보다 김정일의 현금‧현물 확보 관점에서 더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지금 김정일은 남북관계의 틀이 현 상태를 무너뜨리며 획기적으로 바뀌는 것보다 저절로 다가오는 남한을 그대로 두면서 최대한 통치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더 절실한 편이다.

세 번째는 일본을 활용하는 것이다. 9. 19 공동성명에서 미국, 일본과의 관계정상화가 명문화되었고, 고이즈미 총리 역시 북한에 의한 안보우려 해소를 최대의 외교업적으로 삼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최대 100억달러로 추정되는 식민지 배상금중 과거 남한-일본과의 외교수립을 근거로 적어도 50% 정도는 현금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일로서는 놓치기 어려운 카드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향후 6자회담에서 김정일은 중국과 남한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미국과 협상을 밀고 당기며 관련국으로부터는 중유를 비롯한 현물 타내기, 남북관계에서는 경제지원, 일본과는 수교협상에 골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노무현 정부는 남한 내 정국 타개 및 차기 대선과 관련, 더욱 북쪽으로 행보를 강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일은 정상회담을 구걸하는 남한 정부를 요리하기 쉽다. 어떤 거래든 급한 쪽이 항상 불리하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노무현 정부는 이미 불리한 협상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의미다. 앞으로 2007년까지 과거와는 다른 ‘남한발 북풍’이 어떤 형태로 한반도 정세를 헝크러 놓을지 유권자는 예의 주시하고 있다.

정권에 대한 기대는 이미 접었고, 이제 기대할 것은 한반도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려는 국민의 힘밖에 없는 것 같다.

손광주 편집국장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