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식 ‘속도전’이 북한 망쳐놨다

▲ 북한의 속도전 상황판 (사진:연합)

요즘 북한 방송을 보면 ‘인민군대를 따라 앞으로!’라는 슬로건들이 담벽마다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조선중앙방송, 중앙TV 등 관영 방송매체에는 주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선동앵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린다. 지금 북한의 도시는 이런 방송으로 소란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자도 북한에서 겪어보았지만 해마다 연초가 되면 괜히 두어 달가량 이렇게 들볶기곤 했다. 그런데 올해에는 기간이 좀 긴 것 같다. 아직까지 미국과 ‘타결’을 못 보았으니 당연하다.

한반도 정세가 복잡해지면 북한은 주민 내부결속에 들어간다. 상투적인 수법이다. 바깥 정세를 복잡하게 휘저어 놓고 가뜩이나 살기 힘든 인민들을 들볶아 댄다. 당장 ‘미국놈’들이 쳐들어 오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면 미국이 먼저 머리를 숙이며 협상테이블에 들어오고, 한반도 긴장을 푸는 대가로 돈까지 얻어낼 것이라 계산한다. 이것이 김정일의 ‘외교공식’이다. 그 기간에 주민들은 모든 생업을 중단하고, 하는 일 없이 언 땅에 배를 붙이고 김정일의 흥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혈질’ 김정일이 만들어낸 속도전

북한에서 ‘속도전’은 김정일이 1970년대에 제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김정일은 다혈질적이고 즉흥적인 성미여서 뭐든지 빠른 걸 좋아한다. 이런 김정일의 성격과 맞아 떨어지면서 자기의 능력을 보여준 계기가 ‘속도전’이었다.

후계자로 등장하던 시기에 김정일은 ‘70일 전투’, ‘200일 전투’ 등을 발기하여 전국이 바글바글 대는 모습을 김일성에게 보여줬다. 이때 김정일의 리더십이 부각되어 후계자 내정에 결정적 작용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속도전의 요구는 “속도와 질을 다같이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속도’가 우선적으로 제기되다 보니 질이 제대로 보장될 리 없다. 북한이 대표적인 자랑거리로 삼는 건축물들은 실은 이렇게 날림식으로 건설된 ‘대표적 부실공사’이다.

그때 건설된 건설물들이 아직도 후유증을 앓고 있다. ‘70일 전투’ 때 만들었던 황해제철소의 자동화 설비는 이미 파철(破鐵)이 된 지 오래고, ‘바다를 막은 거창한 사업’이라던 서해갑문으로는 드나드는 배가 거의 없어 썰렁한 바람만 불고, 105층짜리 류경호텔은 언제 무너질지 몰라 사람들에게 공포감만 안겨주는 미완성의 흉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김정일은 ‘속도전’만이 북한식 투쟁방식이라고 주장하고, 위기탈출의 방책으로 삼고 있다.

학생도 농사짓고 노동자도 농사짓고 군인도 농사짓고

그 바람에 녹아나는 건 군대와 주민들뿐이다. 북한에서는 분업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농민은 쌀을 만들고, 노동자는 물건을 만들고, 학생들은 공부하고, 연구사는 연구를 한다는 식의 명확한 직능이 없다. 김정일이 한번 “돌격”하면 어디든 끌려가야 하는 마구잡이 국가다.

농번기가 되면 학생들은 학교 문을 닫고, 노동자들은 공장문을 닫고 농촌에 나가 농사를 돕는다. 이들은 사회주의 농촌을 돕는다는 지원자로 가지만, 정작 중심이 되어 일해야 할 농민들은 그 기회에 뒷짐을 지고 쉬면서 ‘이것 해라 저것 해라’ 지시만 한다. 그래서 생겨난 은어가 ‘지도농민’이다. 제 일을 안하고 지시만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또한 북한은 힘들 때마다 군대를 모범으로 앞세우면서 주민들에게 ‘혁명적 군인정신을 따라 배우라’고 선전한다. 그런데 군대가 하는 일은 속도가 빠른 반면, 완전 엉터리 날림식이다. 일년 내내 총만 잡고 있던 군인들이 건설을 하면 얼마나 잘하고, 기술경제타산엔 얼마나 밝겠는가.

건설기계가 없어 중세기적인 ‘인해전술’에 매달리기 때문에 공사는 ‘사람의 시체를 쌓아 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도 그런 군대식의 일본새를 배우라고 하는 김정일은 사람을 얼마나 더 죽여야 정신을 차릴지 의심스럽다.

군대들이 일하는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도 남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 된다. 극심한 기아와 살인적인 노동강도 때문이다. 공사 중에는 영양실조자와 사망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자식들을 고이 길러 군대에 내보낸 부모들은 자식들이 죽었는데도 매맞아 죽었는지, 굶어 죽었는지 원인 모를 사망통지서 하나만 전달받으면 끝이다. 인간의 가치가 종잇장 하나로 대신하는 것이다.

빨라도 실속은 전혀 없어

1989년 현대그룹 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평양 ‘5.1일 경기장’을 참관한 적이 있다. ‘5.1일 경기장’은 15만의 관람석을 가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현대적인 경기장이다. 88서울올림픽 공동개최를 떠들면서 지은 것이다. 올림픽 공동개최가 무산된 후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때 이용한 것 외에는 별로 효용가치가 없어 항상 비워둔다.

안내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돌아보던 정 명예회장은 경기장을 크게 지어졌다고 평가하고, “이 경기장을 짓는 데 얼마나 들었는가”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안내원이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현명한 지도 밑에 최상의 빠른 기간 내에 건설하면서 10억 달러를 썼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것도 인건비는 한 푼도 계산되지 않은 돈이었다. 정 회장이 “그 만한 돈이면 나는 이런 경기장을 세 개나 지었겠다”고 혼자 중얼거렸다는 이야기가 북한 주민들 사이에 전해진다.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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