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후계구축 과정서 장성택 역할 과대평가돼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이 북한의 핵심 실세 중 한 명인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를 보면 장 부장의 위상과 영향력이 실제보다 훨씬 과대평가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2008년 김정일의 건강 이상 이후 장성택이 어떠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가 김정은 후계체계 구축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결정되는데 장성택의 건의가 ‘결정적’이었다?


2008년 8월 김정일 총비서의 건강 이상 이후 북한 지도부에서는 후계자의 공식 결정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08년 말경 당 지도부에서 삼남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공식 결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은 김정은의 생일인 2009년 1월 8일 그를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교시를 리제강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게 하달했다. 리 제1부부장은 조직지도부의 과장급 이상 간부들을 긴급 소집, 김정일의 결정 사항을 전달한 데 이어 각 도당으로까지 후계 관련 지시를 하달했다. 이에 따라 당의 핵심 엘리트들에게 후계자 결정 소식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북한체제의 ‘군주제적’ 성격으로 인해 지도부 내에서는 당시 김정일의 아들 중 한 명이 후계자로 결정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의 ‘후계자론’에 의하면 ‘후계자’는 수령과 같은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외부 세계에서는 북한체제의 ‘군주제적’ 성격과 ‘후계자론’ 그리고 김정은의 리더십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정일의 건강 이상 이후 장성택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게 되었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사실을 제일 먼저 보도한 한 언론도 2009년 초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하는데 “정남의 후견인 역할을 해온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건의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북한의 고위층들은 장성택 부장이 추천한 후계자가 자신과 각별한 관계인 정남 대신 불편한 관계이던 정은이라는 점에 적잖이 놀랐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김정은이 후계자로 결정되는데 장성택의 건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2009년 5, 6월경 북한 군대에서 배포된 대외비 문건인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는 2006년 12월 김정은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졸업증을 받을 때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비밀 문건의 주장은 북한 내부 소식통을 통해 입수한 정보들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따라서 김정일의 건강 이상 이후 장성택이 후계자 공식 결정 시기를 앞당기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을 수는 있지만, 이 시기에 김정은이 후계자로 결정되는데 장성택의 건의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


2009년 초 당시 다수의 언론은 장성택을 ‘김정남의 후견인’으로 묘사하고, 장성택이 김정은과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것처럼 소개했다. 그런데 북한에서 장성택과 김정은을 여러 차례 만났던 후지모토 겐지는 2008년 12월 필자에게 “장성택이 과거 김정은의 교육을 담당했다”고 밝히면서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하면 장성택이 100% 서포트(지원)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장성택이 과거 김정남의 해외 유학뿐만 아니라 김정은의 과외교육 및 해외유학까지 지원했으며 장성택과 김정은의 관계가 ‘불편한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2004년 고영희와 그의 측근들에 의해 장성택이 ‘직무정지’ 당하고 장성택의 측근들 상당수가 ‘혁명화’를 경험하거나 숙청되었기 때문에 장성택이 김정은의 모친인 고영희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김정일이 가장 총애하는 아들인 김정은에 대해 장성택이 감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장성택이 김정일의 의중을 무시하고 그의 ‘숨겨둔 아들’ 김정남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김정은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김정일이 그를 결코 곱게 볼 리 없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세 아들 중 누구를 가장 총애하는지 잘 알고 있는 장성택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건의했다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 ‘놀라운’ 일은 결코 아니다.


김정은의 후계체계 구축과 장성택, 리제강, 김정각의 역할


일부 전문가들은 “장성택이 2008년 8월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부터 3년 5개월간 김 위원장을 직접 보좌하며 국정 전반을 운영해왔고, 현재도 사실상 섭정체제를 이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정일의 건강 이상 이후 국정운영과 관련해 장성택이 다른 엘리트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지만, 장성택만 김정일을 보좌한 것이 아니며 그가 ‘국정 전반’을 운영할 수 있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은 것도 아니다. 김정일이 김정은을 자신과 같이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는 후계자로 결정한 상황에서 김정은이 아니라 장성택에게 ‘국정 전반을 운영’할 권한을 준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정일의 건강 이상 이후 그의 공개 활동 수행인물에는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과 여동생 김경희, 리제강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수행 횟수가 현저하게 증가한 것이다. 장성택 행정부장은 파워 엘리트 중 2008년에 김정일의 공개 활동 수행횟수에서 4위를 차지했으나, 2009년에는 2위, 2010년에는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수행횟수가 급증했다. 김경희 경공업부장(現 노동당 비서)은 2008년에만 해도 김정일의 공개 활동에 단 한 차례도 동행하지 않았으나, 2009년에는 17회 동행함으로써 파워 엘리트 중 수행횟수에서 13위를 차지했고, 2010년에는 무려 163회를 동행함으로써 166회를 기록한 장성택에 이어 수행 횟수에서 2위를 차지했다.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된 이후 장성택과 김경희에 대한 그의 의존도가 급속도로 커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장성택과 김경희는 별거상태를 유지할 정도로 관계가 불편했기 때문에 김경희의 수행횟수 증가는 장성택에 대한 김정일의 의존도를 상대적으로 줄이는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장성택과 김경희만큼 김정일의 공개 활동 수행횟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수행횟수 증가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는 북한을 움직이는 핵심 실세들인 당중앙위원회 비서들이 소속되어 있는 본부당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리 제1부부장은 고령으로 김정일 수행횟수가 점차적으로 줄어들어 2007년에는 단 한 차례 수행했고, 2008년 8월 김정일의 건강 이상 이전에도 단 한 차례만 수행했다. 그러나 2008년 11월부터 김 총비서가 공개 활동을 재개하면서 이후 급격히 그의 수행 횟수가 늘어났다. 리제강이 2008년 8월 이후 연말까지 8회, 2009년에는 17회를 기록한 데 이어 2010년에 21회 현지지도를 수행한 것은 그가 김정은 후계체계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리제강은 2008년부터 김정은의 후계자 지명을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해온 것으로 판단된다. 2009년 1월 8일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결정한 사실을 장성택 행정부장이 아니라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통해 핵심 엘리트들에게 통보한 것은 엘리트에 대한 김정은의 통제 및 장악과 관련해 리제강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2009년 1월 이후 김정은은 리제강 및 장성택과 함께 엘리트 인사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9년 여름경 김정은은 당의 과장급(한국 정부의 국장급) 이하 중간 간부에 대한 인사권까지 장악했고, 부부장급(한국의 차관급) 이상 고위급 간부들 인사는 김정일에게 직접 건의하여 비준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은이 군부 엘리트들을 장악하는 데에는 북한군 간부들의 조직생활을 통제하고 인사권을 행사하는 김정각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은의 후계체계 구축과정에서 장성택이 김정은의 고모부로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는 있지만, 당과 군대에 대한 김정은의 장악과정에서는 리제강과 김정각 등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정은의 부상과 장성택의 승진 간의 함수관계 


김정일 건강 이상 이후 장성택의 위상에 대한 과대평가는 당시 김정은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던 현실은 보지 못하고 장성택의 상대적 지위 상승에만 주목한 데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므로 장성택의 실제 영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김정은의 부상과 장성택의 승진이 어떻게 연동되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2009년 4월 9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1차 회의에서 장성택 행정부장은 주규창 당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 주상성 인민보안상, 김정각 총정치국 제1부국장 등과 함께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당시 일부 전문가는 이를 “정운(정은)을 후계자로 제청한 ‘믿을 수 있는’ 장 부장을 국방위원에 앉히고 다른 국방위원과 군부 요직을 ‘장성택 라인’으로 교체함으로써 장 부장을 중심으로 정운의 후계체제를 안착”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국방위가 김정운의 후계구도와 맞물려 노동당에 버금가는 실질적인 기구로 체제를 갖춰나가면서 현재 아무런 공식 직책을 갖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김정운이 국방위에서 일정한 직책을 맡아 후계수업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장성택이 국방위원에 임명된 이후에도 국방위원회는 ‘노동당에 버금가는 실질적인 기구’로 발전하지 않았고, 김정은은 김정일 사망 시까지 국방위원회에서 그 어떠한 직책도 맡지 않았다.


2009년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12기 1차 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이미 북한군은 ‘김정일의 군대’에서 ‘김정일·김정은의 군대’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김정은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그의 최대 후견인인 장성택의 지위도 한층 더 높아졌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김정일은 2009년 2월 11일 당중앙군사위원회 회의를 소집했는데, 이때 김정은의 ‘영군체계’ 수립 관련 중요한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 결과 김정은은 2009년 4월 5일 북한의 인공위성 로켓 발사시 ‘반타격전 사령관’으로서 육해공군을 지휘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김정은이 후계자로서 김정일과 같은 ‘절대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군대에 대한 김정은의 ‘명령지휘체계’가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정은은 또한 2009년 4월부터 무소불위의 권력기구인 국가안전보위부의 부장직에 임명되어 파워 엘리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김정은이 군대에 대한 명령지휘권을 행사하고 핵심 공안기관의 수장 직을 맡게 되는 시점에 장성택은 국방위원회의 제1부위원장과 부위원장직보다 낮은 ‘위원’직에 선출된 것이다.


장성택은 2010년 6월 7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3차 회의에서 다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그러자 국내 일부 전문가는 장성택이 “국방위원에 임명된 지 1년 2개월 만에 국방위 부위원장 자리에 올라 명실상부한 북한의 ‘2인자’ 자리를 굳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북한의 후계자론에 의하면 수령의 후계자는 수령과 같은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는 제2인자가 된다. 그러므로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한 상태에서 장성택이 ‘제2인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09년 말 열린북한통신에 의하면, 북한의 권력을 김정일이 60%, 김정은이 30%, 장성택, 김영춘, 오극렬, 리제강 등 김정일의 최측근들이 나머지 10%를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평가가 북한 내부에서 나올 정도로 김정은은 단기간에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2010년 7월경에는 김정은이 모든 보고를 취합해 김정일에게 보고를 올릴 정도로 국정 전반을 장악하게 되면서 북한의 권력을 김정일과 김정은이 각각 30%, 60% 차지하고, 5%는 장성택과 김경희가, 나머지 5%는 김영춘과 오극렬 등 다른 엘리트들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김정은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처럼 김정은이 사실상 제2인자 또는 제1인자에 해당하는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 시점에 장성택이 군대에 대한 지휘 권한이 없는 국방위원회의 ‘부위원장’직에 선출된 것이다.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가 개최되기 전 국내외의 많은 언론들은 장성택을 ‘명실상부한 2인자’로 묘사하면서 김정일 사후 ‘섭정왕’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마치 김정일 이후 장성택의 결단에 의해 김정은의 정치적 미래도 결정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했다. 그러나 당대표자회 개최 전날 이루어진 인사에서 김경희와 김정은, 최룡해 등은 대장 계급을 수여받았지만, 장성택은 받지 못했다.


그리고 장성택은 당대표자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은커녕 ‘위원’직에도 선출되지 못하고 ‘후보위원’직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당중앙군사위원회에서도 김정은은 부위원장직으로서 제2인자 지위에 선출되었지만, 장성택의 이름은 당중앙군사위원들 중 제일 마지막에 호명되었다. 이는 장성택이 김정일에게 가장 가까운 측근이기는 하지만, 김정일이 혹시라도 장성택이 ‘딴마음’을 먹을 것을 우려해 그에게 공식적으로 높은 지위를 주는 것을 꺼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사실은 김정일이 생시에 장성택에게 크게 의존하기는 했지만, 그가 ‘국정 전반’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정일 사후 장성택의 공식 지위는 상대적으로 더욱 높아지지만, 장성택의 영향력은 항상 일정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김정은 시대 장성택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알아보도록 하겠다. (계속)


※『 NK비전』의 동의하에 동 월간지 2013년 3월호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의 기고문을 데일리NK 칼럼으로 동시에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