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모방정치 타파할 대북전략 준비하자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이 보여준 공식 행보를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모방정치(模倣政治)’다.


김정일 추도기간이 끝나자 마자 군(軍)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 김정은이 신년 첫 공식활동으로 ‘근위서울 류경수105땅크사단’을 방문했다. 1995년 김정일이 보여줬던 모습과 흡사하다. 당시 김정일은 매년 김일성이 육성 발표했던 ‘신년사’ 발표를 접고, ‘다박솔 초소’를 방문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별 이름도 없었던 포병부대 다박솔 초소는 이때부터 김정일 선군정치의 핵심 아이콘으로 부각됐다. 북한 선전매체들은 “눈길을 헤쳐 병사들을 만난 국방위원장이 ‘나는 오로지 군을 믿고 나아가겠다’라는 다짐을 남겼다”고 주장한다.


‘ㅌㄷ제국주의동맹’이 김일성 혁명사의 시작점이라면, 다박솔 초소는 김정일 혁명사의 분기점이다. 북한 혁명역사는 “선군정치의 시작은 장군님의 다박솔 초소 방문”이라고 정식화 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북한의 혁명사 전문가들 사이에서 선군정치의 시작이 김정일의 다박솔 초소 방문이냐, 아니면 105탱크사단 방문이냐라는 논쟁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신년사 대신 노동신문(당), 조선인민군(군), 청년전위(청년) 신년공동사설이 발표된 것도 이때부터다. 1995년 첫 신년공동사설은 ‘위대한 당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새해의 진군을 힘있게 다그쳐 나가자’라는 제목으로 시작된다.


김일성의 사망을 “우리 당과 인민의 최대 상실”로 규정하는 한편 “수령님의 유훈을 계승하는 것”을 북한 최고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 목표는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영도 따라 당원들과 근로자들, 인민군 장병들이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에 대한 절대적 충실성을 지니는 것”을 통해 달성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신년사가 단순히 북한의 한해 국정좌표가 아니라 전세계 인민들에게 보내는 수령 김일성의 메시지라는 것이 당시까지 북한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김정일은 수령만이 할 수 있는 신년사 발표를 ‘사양’하는 겸손을 부리는 한편, ‘신년공동사설’을 내세워 북한 내외에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김일성에 비하면 초라하다 싶을 정도로 연설 능력과 외모가 부족했던 자신을 감추기 위한 구실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김정은 역시 새해 첫 공식 일정으로 군부대 방문을 선택했다. 공식직함이 최고사령관과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뿐이라 군부대 방문 외에 선택지가 없다는 측면도 있으나 수령의 지위를 넘겨받은 그가 산업 현장을 방문했다고 해서 어색할 것은 없다.


어쨌든 군부대 방문으로 첫 행보를 시작했다. 다만 105탱크사단은 김정일이 방문했던 ‘다박솔 초소’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한마디로 북한군의 자존심과 같은 부대다.


사실 북한군이 역사적으로 꼽는 영웅에는 105탱크사단 류경수 외에도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활동당시 전설처럼 활동했다는 ‘오중흡’, 6.25전쟁 당시 노동당 방침에 따라 목숨을 내던지며 동부전선 1211고지를 지켜냈다는 ‘이수복’, 6.25 전쟁 당시 전선사령관으로 활약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김책’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중에 한명만 꼽으라면 단연 류경수다.


오중흡, 이수복, 김책 등은 죽으면서까지 김일성의 명령을 집행한 영웅이었지만, 어쨌든 방어전에서 전사했던 인물들이다. 오중흡은 김일성 빨치산 부대가 일본 관동군에 쫒겨 도망 다니던 이른바 원조 ‘고난의 행군’ 직후에 죽었고, 이수복과 김책은 6.25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이후 사망했다.


그러니까 오직 류경수만이 서울점령이라는 ‘공격성과’를 만들어낸 셈이다. 그는 서울 중앙청에 최초로 인공기를 꼽았던 전차부대를 이끌었는데, 당시 전차의 번호 ‘105’와 류경수라는 이름, 서울, 김일성이 직접 그 전과를 치하하는 의미의 ‘근위(近衛)’라는 수식어까지 조합돼 ‘근위서울류경수105땅크사단’이란 가장 화려한 부대명이 하사됐다.


김정일 역시 105탱크사단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공식화되기도 전인 1960년에 김일성을 따라 이 부대를 방문했는데, 첫 공식 군부대 방문이다. 2008년 와병 이후에도 김정일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북한 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2009년 1월 1일에도 이곳을 새해 첫 방문지로 선택했고, 2010년에는 새해 첫 군부대 방문지이자 그해 마지막 방문지로 이곳을 골랐다. 이쯤 되면 선대(先代)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부대이자 남조선의 심장 서울을 점령한 전과를 기록하고 있는 이곳이야 말로 어린 후계자 김정은이 선택하기에 가장 무난한 대상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나온다.


김정은은 신년공동사설에서도 뭔가 획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1995년 김정일의 첫 공동사설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온갖 미사어구를 동원해 부친 김정일을 극찬하면서 선군정치 유훈을 계승하자고 독려했다.


후계자로서 떠안아야 할 인민경제분야와 국가재건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당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이중성도 김정일과 똑같다. “경제에는 손대지 말라”는 김정일의 지론을 따라 배운 것일까? 인민들의 먹는 문제, 식량문제는 모두 당조직 책임으로 넘겼다.


“오늘 당 조직들의 전투력과 일군(꾼)들의 혁명성은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서 검증된다”며 당원들을 압박하는 대목은 이번 공동사설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조문문제를 시비로 남한 정부를 ‘역적패당’이라고 몰아붙이며 호전성을 과시한 대목도 있는데, 이 역시 1995년 공동사설의 재판(再版)으로 평가된다.  


일단 김정은이 제 아버지를 모방하는 선에서 첫 공식일정들을 소화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정일만큼의 정치적 성과를 획득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105탱크 사단을 첫 방문지로 고른 것도 김정일의 선택에 비하면 낮은 수다. 김정일은 다박솔 초소 방문을 통해 ‘선군정치’라는 신조어를 만들고, 자신에 대한 신비감을 두텁게 형성시켰으며, 심지어 남한 정보당국에게 ‘어디에 위치한 무슨 부대냐? 방문 목적은?’이라는 커다란 숙제까지 남겼다.


지금까지 다박솔 초소에 대해 알려진 정보로는 ‘황해북도 지역의 한 포병부대’ 정도인데, 이것도 2000년대 후반에야 알려진 것이다. 이렇게 김일성과 차별화된 행보를 통해 독자적인 통치방식을 창출하며 후계자로서 ‘새로운 노선 확립’까지 달성한 김정일에 비해, 김정은의 행보는 지극히 단순한 ‘답습’ 차원에서 머무르고 말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찾던 곳이니, 나도 찾는다’는 수준이다.


아마도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김정일이 만들어 놓고 간 통치 매뉴얼을 혼자 들춰보며 당분간 몇 가지 공개행사 쯤은 그럭저럭 꾸려 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북한에서 노동당 총서기 추대, 국방위원장 추대, 김정일 생일행사(2.16), 김일성 생일행사(4.15) 등을 처리하는 것은 그리 복잡한 통치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명박 정부의 조문거부를 시비삼아 4월 남한 총선을 흔드는 대남도발을 기획하는 것도 더 이상 ‘새로운 전술’이 아니다. 이 정도의 모방 시나리오는 지난 수십 년간 김정일 통치를 근거리에서 지켜봤던 장성택, 김경희도 능히 쓸 수 있는 것으로, 심지어 남한내 북한 전문가들 대부분이 이미 예측하고 있는 ‘뻔한’ 수에 불과하다.


개방적인 정치구조를 갖고 있는 사회와 달리 1인 권력 구조를 갖고 있는 경직된 북한에서 최고지도자의 국정 전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그 자체가 심각한 불안요소가 될 수 있다. 최고지도자의 국정전략에 약점이 많아도 문제고, 약점이 없어도 문제인데, 일단 논리적 약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핵심간부층의 불안심리가 증폭될 것이다. 논리적 약점이 적다하더라도 최고지도자의 국정전략이 뻔 한 명제로 고정화 된다면 간부들의 관료주의, 무사안일주의, 형식주의를 피할 길이 없다.


국정전략 수립 주체가 김정은인지, 측근인지의 문제도 결론은 같다. 김정은이 독단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으면 많을수록 간부들의 적극적인 국정참여는 위축될 것이고, 김정은이 장성택 등 특정인에게 정책개발을 의지한다 싶으면 나머지 간부들이 그 사람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방정치는 궁극적으로 김정은의 전략부재, 능력부재를 간접 시인하는 꼴이 되고 말텐데, 이때쯤이면 간부들간 경쟁이나 감시, 솔직한 보고 등이 급격히 와해되어 1인 권력 구조의 필요조건들이 흐트러지게 될 것이다.


이미 김정은에게는 어린 나이, 미천한 경력, 생모(生母)와 성장과정을 공개할 수 없는 상황 등 태생적 한계가 분명하다. 때문에 김정일 방식을 답습하면서 자기 경험을 확대하는 전략이 어느 시점에서는 새로운 자기만의 통치력 확보로 전환될 것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 북한 핵심간부들이 진심으로 김정은을 지도자로 따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사실은 불가능에 가깝다. 김정일이 만든 시스템이기에 김정은이 안착할 수는 있었으나, 김정일이 아니면 중장기 운영이 불가능한 독특한 체제, 이것이 바로 김정은 체제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불안요인이다.


김정은의 모방정치에 대해 단기적으로 우리정부가 선택해야 할 대북정책은 비교적 간단명료하다. 우선 김정은 체제가 중장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조건임을 직시하고 다음 정부가 즉각 꺼내 쓸 수 있는 북한 급변사태 대책을 꼼꼼히 마련해 둬야 한다.


현재 김정은 개인과 김정은 체제가 안고 있는 약점과 한계는 외부사회의 대북정책이나 북한내 반대세력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 아니라 김정은 개인, 북한의 수령독재체제 자체가 잉태한 것이다. 외부세계가 김정은의 성공과 김정은체제의 안정화를 희망한다 하더라도 이를 현실화 할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 이점을 미국과 중국, 일본에게 분명히 설명해야 하고, 특히나 핵 관리를 필두로 하는 국제사회의 데드라인(deadline) 형성을 주도해야 한다. 


단기적으로 김정은이 3차핵 실험이나 대남 국지전을 벌이면 큰 손해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는 한편, 북한 체제의 안정성을 수시로 파악할 수 있는 인도적 지원 프로그램과 북한인권개선 정책을 병행 추진하는 전술이 필요하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 시기로 예상되는 김정은의 군사도발을 고려해 안보태세를 확립하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 역시 모방정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다. 이 대통령의 오른팔로 통하는 류우익 통일부 장관은 부임 이후 계속 ‘북한과 대화 노력’을 주장했다. 이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선거용 남북정상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뒤집고 대선 직전 평양행 승용차에 몸을 실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잔영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 사망으로 인해 류 장관의 이런 언행이 잠시 중단되긴 했으나, 대북정책에서 ‘원칙’을 강조했던 현인택 대통령 통일특보가 국민의 눈앞에서 사라졌고, 청와대 통일비서관까지 최보선 전 통일부 대변인으로 교체된 것은 도대체 이 정부가 지금 계획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단기적 성과를 내는 데 모방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정치라는 생물체는 모방만으로 키워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특히나 장기적 성과는 ‘원칙’과 ‘뚝심’이 필수다. 김정은은 자신과 일족의 안위만을 위해 그 자리에 올랐다고 하지만, 이 대통령은 완전히 다르다. 길게 보면 앞으로 한반도 10년을 가늠할 2012년을 임기 마무리 1년이라고 해서 대충 넘어가려 해선 안 된다. 한반도는 지금 새로운 상황으로 넘어가고 있다. 역사의 기회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소명의식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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