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사망한 지 8개월여 지났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북한에서 중요한 변화들이 있었으니까, 한번쯤 리뷰(review)가 필요할 것 같다. 지난 8개월을 일단 ‘정리정돈’ 해놓고 한반도 정세를 전망해보자.
예상대로 지난 4월 김일성 100회 생일 기간 동안 김정은의 권력세습이 진행되었다.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장거리 미사일도 발사했고, 또 이영호 총참모장 등을 숙청하면서 군(軍)내부도 정비하였다. 김정은은 ‘현대적인 젊은 김일성 이미지’로 주민들에게 계속 다가가고 있다.
아직은 판단이 좀 이르긴 하지만 김정은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똑똑한 것 같다. 록키 영화도 공개하고 일본으로 도망간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를 다시 부르는 등 중앙당 선전부가 일일이 보좌하기 어려운 부분도 잘해내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먹는 문제’ 해결에 돌파구를 여는 것인데, 먼저 장성택이 총대를 매고 중국에 갔다.
북중은 지지부진한 황금평·위화도, 나진선봉 개발에 다시 힘을 넣기로 했고, 원자바오는 장성택에게 정부 인도(引導), 기업 위주, 시장 원리, 상호 이익이라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또 덧붙여서 법규 개정, 토지 세금분야 개선 등 기업투자 유치와 시장 메커니즘 작동을 위한 세목까지 코치를 해주었다. 장성택은 당장 배가 고픈데, 원자바오는 밥솥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중국이 ‘선발대’ 격으로 온 장성택에게 달러와 식량을 얼마나 주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앞으로 김정은이 방중해서 새 지도자 시진핑과 “대를 이은 북중 우호관계를 한 차원 더 높이자”는 식의 약속을 할 시점에서는 중국이 김정은에게 섭섭하지 않을 정도의 지원은 해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장성택이 선물을 못받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김정은이 성공적인 방중을 마치고 나면 내외적으로 자신의 체제가 안정된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자부할 것이다. 만약 김정은이 시진핑과 매우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할 경우, 그 다음에는 대미관계, 대일관계를 슬슬 타진하면서, 동북아 환경을 북한에 유리하게 끌고가기 위해 ‘남조선 새 정부 길들이기’에 나서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향후 김정은의 방중 내용과 성과가 어떨지 비상한 각도에서 주목해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 김정은 체제는 안정되게 잘 굴러갈 것인가?
김정일 사망 후 지금까지를 돌아보면 일단 모양새는 그럭저럭 갖추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부를 들여다 보면 여전히 ‘글쎄 올시다’가 아닌가 싶다.
김정은 체제는 이제 막 변화의 초입에 들어섰는데, 앞으로 계속 변화로 갈지, 아니면 어느 시점에서 “에고, 안 되겠다” 하면서 유턴할지 분명치 않다. 또 변화로 계속 가다가 다시 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이미 몇 가지 객관적 변화요인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수령 유일체제인 북한에서 ‘김정일 사망’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 그가 사망함으로써 김일성·김정일식 유일체제는 현실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김정일 사망 후 북한 권력 내부가 자연스럽게 변화하였다. 김정일식 1인 절대권력이 사실상 무너지고, 김정은을 중심으로 장성택·김경희의 가족통치 +김가(金家)의 ‘최대 집사’인 최용해에 의한 권력 분점 형태로 이행하였다.
장성택은 2인자이지만 ‘사실상의 1인자’ 역할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번 중국을 방문한 장성택은, 말하자면 ‘김정은의 대리인’ 자격이었는데, 그는 김정일 시기에도 ‘2인자’였지만, 김정일의 지시로 실무 방문했던 때와 이번 중국 방문을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있다. 장성택이 그냥 의례적인 2인자라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국가수반급’ 대우를 해주었겠는가?
앞으로 장성택의 권력이 김정은이 ‘수령’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로 그치게 될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만약 임의의 시기에 김정은이 권력의 유일영도체계를 수립하려 할 경우 장성택·김경희의 입지는 좁아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김정일 사망 후 당·군에 장성택의 사람들이 포진해온 현실을 고려해볼 때, 김정은+장성택·김경희+최용해의 권력구도가 ‘불안정 속의 안정’ 형태로 유지될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상 ‘김정은·장성택·김경희 공동정권’으로 고착될 수도 있으며, 또 내부 갈등이 전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북한권력은 지금도, 앞으로도 유동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둘째, 권력분점에 따라 당-국가 시스템이 일부 조정되는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북한체제는 결국 ‘사람’에 의해 작동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은 ‘대통령직’에 적절하다고 추정되는 사람을 국민이 선출하여 헌법시스템 속에 집어넣지만, 북한은 김정은 장성택 김경희 최용해라는 ‘사람’이 자신들의 생존에 유리하게끔 시스템을 때려맞추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스템 중심의 북한분석은 여전히 한계가 있고, 기상학의 ‘나비 효과’처럼 당과 군, 내각의 사건사고가 어떻게 비화될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김정일식 1인 지배’의 체제 내구력이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경제분야에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우리식의 새로운 경제관리체계를 확립할 데 대하여'(6.28 방침)라는 지침이 내부적으로 하달되었다.
핵심은 집단농장 분조제 4~6명으로 축소, 국가대 개인(분조) 7:3 분배, 공장·기업소 자율 확대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6.28 방침’의 내용이 전면적으로 공개되지 않아서 그 변화의 방향이 도대체 어디인지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이 아주 새로운 개혁을 하거나 김일성 김정일 시기에서 획기적으로 개혁된 방향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김정은 장성택 김경희 최용해가 권력의 정당성을 계속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의 ‘북한권력 4인방’이 색다른 길을 모색하다가 자빠지게 되면 이들을 구출해줄 사람도 없을 뿐더러, 그때부터 이들은 확실한 ‘인민의 적’이 된다. 노회한 장성택이 과연 이 사실을 모를까?
그래서 ‘김일성주의+ 현실 고려’가 변화의 방향이 아닐까 싶다. 즉 이른바 ‘김일성의 사회주의 사상이론(교시)과 사업작풍’을 뼈대로 하고, 북한이 처한 내외적인 변화의 현실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식 개혁개방 연수니, 베트남식 도이모이 연수니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참고사항’의 성격과, ‘우리도 좀 변화해보려고 하니까 중국 남조선 미국 등등은 지원을 해달라’는 사인을 보내는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본다.
결국은 ‘모기장 특구형태’로 귀착될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기미를 보이고 있는 6.28 방침이라는 것은 어떻게 될까? 아직은 내용이 다 파악되지 않아 말하기 어렵지만, 앞으로도 핵심관건은 ‘김일성과 시장경제’를 이론과 실제에서 어떻게 하면 조합해낼 수 있느냐일 것이다.
지금 북한에 ‘시장(market)’은 있으나 ‘시장경제(market economy)’는 없다. 원자바오가 강조한 ‘시장원리’는 없고 상거래가 있을 뿐이다. 시장경제가 작동하려면 원자바오가 장성택에게 코치해준 것 이상의 많은 대외·대내의 사회적 인프라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과 시장경제’는 끝내 조합이 가능하지 않고, 이것이 김정은의 딜레마가 될 것이다.
오래된 농담으로 결론을 맺자. 김정은이 ‘김일성과 시장경제’를 현실에서 조합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비오는 달밤에, 불타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월남 스키부대 시절에 대하여, 나홀로 여럿이 토론해보자”는 말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