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해외 망명說 왜 유력한 시나리오인가?

5일 일본 언론을 통해 김정남의 마카오 망명 가능성이 제기됐다. 아직 구체적 사실이 확인되진 않았지만 북한 절대권력의 상징인 ‘김정일’의 장남이 망명을 택했다는 것은 북한 권력승계가 내외에 큰 충격파를 던져줄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북한에서도 최고의 자유와 풍요를 향유하고 있는 그가 망명을 택하는 시나리오가 유력하게 흘러나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북한이 다른 기존 공산주의 국가와 달리 수령절대주의와 유일사상체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최고 권력자가 되면 자신과 경쟁했던 그룹에 대해 정치적 사망을 선고하는 과정을 거쳐왔다.

김정운이 차기 권력자로 확정되면 장남 김정남은 왜 국외 망명을 유력하게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는걸까?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 북한 권력의 특징을 통해 여기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김정남은 1971년 5월 10일 평양의 봉화진료소에서 ‘비밀리에’ 출생했다. 김정일은 여배우인 성혜림(2002년 사망)에게 반해 동거를 시작했고, 그렇게 얻은 자식이 김정남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당시 유부녀였던 성혜림과의 동거를 김일성에게 알리지 않았고, 김일성은 1975년 경에야 김정남의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 ‘사생아’ 태생의 한계…숨겨진 황태자로 특권 누려=김정남은 실질적인 김정일의 ‘장남’이지만 김정일이 다른 남자의 부인을 가로채 태어난, 말하자면 ‘사생아’ 신분이다. ‘지도자’ 동지가 유명 여배우를 몰래 데리고 살았다는 사실이 북한 주민에게 알려진다면 김정일의 권위를 상처를 입힐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결국 김정남은 ‘비운의 왕자’로 그동안 권력의 양지로 나오지 못했다.

실제 김정일은 첫 아들인 김정남에게 극진한 사랑을 쏟았다고 한다. 성혜림의 조카로 1982년 한국에 망명한 고(故) 이한영 씨는 수기를 통해 김정남의 유년시절은 ‘황태자’ 그 자체였다고 밝히고 있다.

김정일은 김정남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줬다. 한 번은 김정일이 관저 안 대회의실에서 정남에게 중앙의 자리에 앉으라고 한 다음 “정남아, 네가 커서 이 다음에 큰 소리 칠 자리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정남의 유년 시절은 김정일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누린 시기였다.

그러던 중 성혜림은 김정일이 정식 결혼을 할 경우 아들까지 잃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신경쇠약 노이로제를 겪고 1974년부터 모스크바로 치료를 받으러 가게 된다.

이 사이 김정일에게는 고영희란 새로운 애첩이 생겼다. 고영희는 무용수 출신으로 남한에서 소위 말하는 ‘기쁨조’ 출신이다. 고영희는 1976년 경부터 김정일과 함께 살기 시작하는데 이후 정철과 정운 두 아들을 낳았다.

김정남은 소년 시절 스위스 제네바 국제학교에 다녔다. 김정일의 자녀들은 대부분 해외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는데 ‘지도자 동지’의 사생활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보안상 문제로 인해 2년 만에 유학을 마치고 평양에 돌아오게 된다.

► 日 밀입국 사건으로 미운 털…10여년간 해외 떠돌이=이미 이 때는 김정일의 총애가 고영희에게로 옮겨 가기 시작한 때로 김정남은 이후 고영희와 그 측근들의 견제를 받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88년부터 2001년까지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로 일했던 후지모토 겐지 씨는 고영희에 대한 김정일의 사랑은 각별했고 신뢰도 두터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3년 동안 ‘장군의 연회’에 수백 번 가봤지만 단 한 번도 김정남을 본 적이 없다”며 북한 고위층에서 김정남은 아예 논외의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반면, 최근 후계자로 확정됐다고 알려진 삼남 김정운은 장군 주최 연회에 자주 참석하며,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했다.

김정남이 후계자 자리에서 급속하게 이탈하게 된 계기는 1996년 성혜랑(이모) 서방 망명 사건이다. 이에 앞서 사촌인 이한영은 한국으로 망명해 김정일 로열패밀리의 사생활을 수기로 펴내기도 했다. 김정남이 결정적으로 김정일의 눈 밖에 난 것은 2001년 5월 1일 위조여건을 갖고 일본 나리타 공항으로 밀입국 하려다 체포된 사건 때문이다.

당시 김정남의 체포 소식은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 베이징 공항에 내린 정남은 이후 한동안 북한에 들어가지 않고 중국, 러시아, 홍콩, 마카오 등을 여행하고 다녔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고영희가 사망한 이후에 김정남은 그동안의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국내로 들어와 후계자 다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됐었다.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와 그 남편인 장성택이 김정남의 후계 지명을 지원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돌았었다.

► 후계구도 탈락 유력시…숙청 피해 망명시도 했을수도=여기에 중국이 해외에서 외부 세계를 오래 경험한 김정남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이끌기에 유리하다고 판단, 정남을 후계자로 적극 후원하고 있다는 설도 나돌기는 했었지만 현실성이 낮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현재로서는 삼남인 김정운의 후계자 지명이 유력해지고 있는 가운데, 김정남은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탈락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김일성 일가의 가정교사를 20년간 지낸 김현식 미국 조지메이슨대 연구교수는 “김정남의 친어머니인 성혜림이 김정일과 동거 전 이미 딸을 하나 두었던 다른 사람의 아내였다”며 “출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김정남의 큰 약점으로 후계자가 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김정남은 해외에 체류하면서도 김정일의 생일이나 주요 행사 때마다 평양에 돌아와 몇 달간 머물다 돌아갔다. 최근에는 북한을 오가며 공항에서 만나는 기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언론플레이’를 펼치는 기행(奇行)도 펼치고 있다.

특히 올해 초 “후계 문제는 아버지가 결정할 일이다.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정보도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며 후계 문제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직후에도 기자들과 만나 “발사에 대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북한 언론은 성공했다고 보도하고, 해외 언론은 실패했다고 보도하는 것은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등 본인이 사실상 북한 권력층에서 밀려나 있음을 시사했다.

김정남의 망명설을 보도한 언론은 김정남이 김정운의 후계자 지명 이후 자신을 포함한 측근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망명을 택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최근 김정남의 행적을 봤을 때 북한에서 권력을 집권하기 위한 야심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복동생인 정운이 권력을 잡았을 경우 ‘곁가지’로써 자신의 안전과 장래를 보장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버지인 김정일 또한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 이복 형제들이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해왔다. 수령절대주의를 세습한 김정운의 경우도 이복 형이자 장남이기도 한 정남의 역할을 매우 제한하며 통제할 가능성이 높다.

권력을 잡은 아버지 김정일이 삼촌 김영주, 계모 김성애, 이복 동생 김평일, 김경진을 곁가지로 몰아 정치적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린 사례를 그도 똑똑이 목격해왔다. 북한은 공산당 집단지도체제가 아닌 수령 유일의 권력구조이기 때문에 그와 조금이라도 권력 경쟁을 할 가능성이 있다면 숙청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같은 상황 아래에서 만약 김정남이 망명설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북한에서 김정운의 후계 지명이 기정사실화 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