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암살설, 김정일 학정 반영심리”

▲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된 김일성 시신

지금부터 11년 전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김일성의 심장이 멈췄다. 한반도는 갑작스럽게 충격과 불안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그것도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불과 17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1994년 1차 핵위기가 고조되면서 영변 핵시설 폭격론이 대두됐다. 북한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이후 한반도 핵위기는 분단 이후 최초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호재를 타고 통일 열기로 반전됐다. 그러나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또 다시 요동쳤다.

김일성 사후 외부에서는 그의 사망원인을 두고 갖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소문은 북한당국이 외국의 조의대표단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증폭됐다. 총살 등으로 시신을 공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이었다. 이런 짐작은 김일성의 시신이 공개되면서 수그러들었다.

김일성 사망 5개월 전인 그해 2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방북 때 김일성이 “앞으로 내가 직접 국정을 이끌어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카터가 김정일과 면담을 여러 차례 신청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거절했다. 부자간의 권력 다툼을 암시하는 정황들이 공개되면서 ‘권력암투설로 인한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북한 내부에서도 지식인과 중앙당 간부, 지역 책임간부 중심으로 여러 풍설(風說)이 나돌았다. 물론 지금까지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 다만, 김일성에 대한 연민과 김정일의 학정에 대한 분노가 어우러져 각종 소문이 확산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소문은 특정인이 고의적으로 만들어냈다기 보다는 언덕에서 굴러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스스로 살과 몸집을 키워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모양새였다.

김일성 사망에 관한 갖가지 소문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심장발작을 일으킨 원인이다. 여기에는 식량난으로 인한 쇼크, 김정일의 자극설 등이 있다. 또 하나는 응급대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일성 사망 둘러싸고 온갖 소문 나돌아

탈북 시인 최진이(46)씨는 북한 지식인들과 중앙당 간부들 사이에서 김일성 사망을 둘러싸고 온갖 의문투성이 소문들이 나돌았다고 말했다. 월간 『신동아』가 입수, 게재(2005년 1월호)한 북 내부 반체제 문서에는 “1994년 김일성이 죽을 당시 중앙과 지방의 적지 않은 간부들과 각 분야 지식인들이 직감한 것과 같이 김일성의 죽음은 김정일과 깊은 련관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써있다.

탈북자 출신 박상학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식량난을 전혀 모르고 있던 김일성이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은 것이 사망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최씨는 맨 처음 나돈 소문은 담당 의사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김일성 사후 처음 들려온 말은 김일성이 심근경색으로 기절하자 젊은 담당의사가 함께 졸도해버렸다는 것이다. 원래 김일성의 유능한 내과 담당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한 주일 전부터 아파서 김일성의 묘향산 행에 따라서지 못했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담당의 문제에 대해 내부 문서는 “1994년 7월 8일 김일성 급사 당시 그의 곁에 새로 임명된 젊은 이비과 담당 주치의사만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봉화진료소 의사들조차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들 했다.

최씨는 “또 이런 소문도 들려왔다. 김일성 급병 소식을 듣고 평양에서의 의사들을 실은 직승기(헬기)가 묘향산을 향해 날아올랐다. 묘향산에서는 비행기 맞을 준비를 전혀 안 해놓았었다. 비행사는 육안으로 위치를 판단하며 착륙하던 중 나뭇가지에 걸려 비행기 한쪽 날개가 떨어져나갔다고 했다. 또한 중앙당에서 수십 대의 승용차가 묘향산을 향해 올라오다 벼랑에 굴러 떨어졌다”고 말했다.

내부 문서는 최씨의 진술과 조금 다르다. “김정일이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당시 기상악화로 의료진을 태운 직항기가 회항했고, 산사태로 구급차가 되돌아갔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김일성이 심장발작을 일으킨 이후 응급조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김일성 심장쇼크 방치’ 소문이 많아

90년대 후반 국내로 들어온 한 의사 출신 탈북자는 “김일성의 상태가 위급해지자 묘향산에 올라갔던 의사들을 긴급히 호출했다는 것이다. 이는 김일성 바로 곁에 의사들이 없다는 말이 된다. 김일성 주치의들이 묘향산을 몇 번을 갔는데 하필이면 새벽 2시를 전후해 묘향산에 간 것이 말이 되느냐”고 주장했다.

▲ 현지시찰에서 김일성과 김정일

심장질환을 앓아왔던 김일성 곁에 심장담당 주치의가 없었다는 점, 신속하게 응급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점, 구급차와 직송기를 회항시킨 점 등을 들어 고의적인 방치가 아니었냐는 것이다.

박 국장은 김일성의 사망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문을 전한다.

김일성은 김정일의 그늘 속에 같힌 채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장미 빛 환상 속에서 인생의 황혼을 꿈꾸고 있었다고 한다. 2차 정상회담까지 내다보고 기차로 서울 가고픈 마음에 DMZ 철길을 잇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황해제철소 지배인을 불러 7월 15일까지 레일 생산을 끝낼 것을 지시하자 지배인이 식량공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인민들이 굶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후 김일성은 김경희를 시켜 현장 조사를 시켰고, 인민들이 굶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김일성은 ‘내가 부를 때까지 누구든 찾아도 나를 깨우지 말어’라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방으로 들어갔으나 이미 심장이 멎어있었다.

최진이씨 동료, “김정일 자기 권력 잃을까봐 김일성 살해” 주장

최씨는 한 시인이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와 아무런 전제 없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두려웠을 것이다. 이 평양 거리랑 힘들여 세운 것 포기하기 아까웠겠지. 사실 평양이야 깨끗하지 뭐. 그리고 젊은 나이에 권좌를 내놓기도 쉽지 않은 일이고…”

남북관계 진전을 통해 자신의 체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김일성을 강제로 숨지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신동아』게재 내부 문서는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그동안 해왔던 거짓말이 들통날 것이 두려워 김일성을 심장쇼크를 통해 암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남한에 가면 수많은 인민들의 환영을 받을 것이고, 북한 주민들은 잘 먹고 있다고 보고했는데 이 사실이 들통이 날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충신, 효자’ 행사를 하면서 김일성을 ‘귀머거리에 소경’으로 만들고, 인민생활을 도탄에 빠트리고, ‘조국통일의 구성’이 되려고 한 김일성의 ‘평생념원’을 우롱한 대역죄를 회피하기 위해 심장발작을 일으키게 해 죽였다는 것이다.

북 내부소문만 증폭, 증거 하나도 없어

앞에서 열거한 김일성 사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소문 외에도 부검을 서두르고 사인을 급히 결론 내린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은 근거가 미약하다. 주치의가 곁에 없었다거나, 악천후로 구급차가 접근하지 못했다거나, 식량난으로 쇼크를 받아 쓰러졌다는 설들은 어느 하나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북한 내부에서 떠도는 괴소문은 말 그대로 ‘떠도는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김일성은 겉으로는 괜찮았지만 만나 얘기를 해보면 오래 견디지 못할 사람이었다. 듣는 것도 어려워했으며, 그해 5월 눈수술을 받고 휴식이 필요했지만 카터를 만나 피로가 누적됐다”고 말했다.

황 전비서는 “김정일이 남한 주민들이 떠받들 것처럼 말해 조국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에 빠져 무척 들떠 있었으며 정상회담 준비를 손수 앞장섰다. 이 때문에 과로가 심장에 부담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스위스 의료진을 불러 진찰을 받을 계획을 세울 정도로 심장이 오래 전부터 안 좋았다고 한다. 82세의 고령에 과로까지 겹쳐 심근 경색과 쇼크가 겹쳐 사망했다는 북한 당국의 주장에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 “김정일은 김일성을 제거할 이유 없다”

무엇보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김정일의 권력기반이 이미 확고하게 굳혀져 있었다. 김일성 사후에도 북한 권력층에 어떤 동요도 없었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김일성은 이미 김정일의 등에 업혀 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권력에서 김정일이 제거될 가능성은 없었다. 남북정상회담도 김정일의 철저한 기획에 의해 조정되는 상황이었다.

▲ 김일성 사망 당시 오열하는 북한 주민들

무엇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였다. 김정일의 지도력은 김일성의 후광에서 절반 이상이 나왔다. 수령독재사회에서 상징적이나마 수령이 사라지는 것은 김정일의 통치에 결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없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암살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김일성이 식량난을 걱정하다 충격을 받고 사망했다는 것은 주로 북한에서 발표한 1차 자료를 참고로 한 것이다. 자료에는 사망하기 3일 전부터 식량문제로 당 비서들을 모아놓고 밤 늦게까지 회의와 교시를 진행했다고 나온다.

식량 책임자들을 비판하고 대책을 세우는 등 쉬지 않고 인민을 걱정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김일성이 당시 경제일꾼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거나 직접 도 책임비서에 전화를 걸어 지시하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다. 이미 김일성의 역할은 외교 분야에나 한정돼 있었다.

이 자료는 김정일이 식량난 책임을 간부들에게 떠 넘기려는 의도가 강하다. 즉, 김정일은 식량난과 관계없고 간부(특히 사망자가 많은 함북도 책임비서)들이 정책을 잘못 써서 이렇게 됐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분석된다. 카터를 만나고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김일성이 갑자기 농업담당 비서와 도 책임비서를 불러서 식량문제를 직접 주재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 군 당국에서는 김일성이 사망한 날 새벽에 위성을 통해 평양에서 헬기 한 대가 이륙해 묘향산 쪽으로 향하는 것을 감지했다. 돌아왔다는 기록은 없다.

김일성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북한 내부에서 괴소문은 여전하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데는 김정일이 권력을 잡은 이후 북한 사회가 급속도로 몰락의 길로 치달은 것에 대한 원성(怨聲)이 담겨 있다고 탈북자들은 말한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