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스탈린에 ‘3개월내 통일 가능’ 설득 전쟁 승인”

한국전쟁 당시 북한 수뇌부의 개전 지시에 따라 첫 발사 명령을 내린 인물이 소련 국적 고려인인 북한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柳城鐵)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1945년 소련군 장교로 김일성 부대와 함께 북한으로 들어가 한국전에 참전한 고려인 정상진(鄭尙進.90.문학평론가)씨는 24일 카자흐스탄에서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당시 유 국장으로부터 이 같은 말을 직접 들었다고 말했다.

정 씨는 또 김일성이 1949년 초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에게 남침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다음해 4월 다시 소련을 비공식 방문, 끈질긴 설득 끝에 전쟁승인을 받아낸 사실도 공개했다.

한국전쟁 종전 후 소련파에 숙청으로 북한에서 쫓겨난 정 씨는 “북한은 ‘평화통일’을 외치면서도 1946년부터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준비했고, 당시 이승만 정부가 이끄는 남한도 ‘무력통일’을 외치고 있었다”며 “그러나 1950년 6월25일 전쟁이 일어난 직후 북한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승만 도당이 북침해 인민군이 2시간 만에 격퇴한 것으로고 선전했다”고 설명했다.

정 씨는 한반도에서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는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소련군에 자원입대해 1945년 김일성 부대를 따라 북한에 들어갔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러시아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됐고, 러시아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조선인민군 병기총국 부국장(여단장급)에 임명됐다.

그는 “전쟁발발 이전 남북한 상황으로 미뤄 당시 북한 당국의 라디오 방송내용을 그대로 믿었다”고 밝혔다. 1952년 12월초 김일성을 만났을 당시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이젠 전쟁이 거의 끝났으니 문화선전성 제1부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아 이를 수락했다.

정 씨는 “문화선전성 제1부상에 임명된 직후 고려인 동료인 유성철 작전국장(중장)이 나를 평양의 한 술집으로 불러 ‘전쟁은 북한이 시작했다. 내가 1950년 6월25일 오전 4시 (공격개시를 위한) 신호탄을 쏘라고 직접 지시했다’고 밝혀 깜짝 놀랐다”고 회상했다.

이어 “1950년 6월25일에 직접 들은 라디오 방송에서 ’인민군이 국방군을 2시간 만에 격퇴했다’고 전한 데 대해 ‘국방군이 북침했다면 사전에 막강한 무기력을 갖추었을 텐데 2시간 만에 패퇴당했다는 것은 좀 미심쩍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시 정황상 큰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1957년 소련파 숙청 당시 월북 문인들이 대거 희생되면서 북한 정권수립에 일조한 정 씨와 유 씨 등 소련국적 고려인 428명도 북한에서 쫓겨났다. 현재 북한 정권 내 고려인 출신은 한명도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 씨는 특히 “김일성은 1949년 초 모스크바를 공식 방문해 스탈린을 만나 ‘남침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스탈린이 ‘2차 대전이 끝나 복구중인 만큼 지금은 곤란하다’며 거부했다”면서 “그러나 김일성은 다음해 4월 모스크바를 비공식적으로 방문해 ‘1~3개월이면 통일시킬 수 있다고 설득해 승인을 받아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일성은 ‘서울만 함락시키면 이승만 정권이 백기를 들고 나와 통일이 된다’고 판단했지만 서울 함락은 전쟁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며 “북한 정권의 특성상 이러한 전쟁관련 기밀을 공개하지 않아 북한 사람 대부분이 아직도 한국전쟁은 ‘남한에 의한 북침’으로 알고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정씨는 “1945년 소련군 장교로 북한 원산에 들어가 원산시 인민위원회 문화부 차장을 맡게 됐다”면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부로부터 그해 9월말 김일성 부대가 원산항에 도착하니 마중 나가라’는 명령을 받아 다음날 나갔더니 30대의 김일성이 부대원 60여명과 함께 배에서 내리면서 내게 ‘김성주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음날 소련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김일성 장군은 없더라’고 보고하자 사령부에서 ‘김성주가 바로 김일성’이라고 말해줬다”며 “만주지역에서 항일유격대원으로 활동한 이들 중 15명이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일성 장군의 존재 여부는 역사가들이 파헤쳐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