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부자에게 숙청당한 북한 군인들

4월 25일은 조선인민군 창건 78주년이 되는 날이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1948년 2월 8일 군대를 창설했지만, 1932년 4월25일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반일유격대’가 북한군의 모체라며 1996년부터 4.25를 북한군 창건일로 지정하고 있다.


실제 인민군의 역사는 김일성이 구 소련의 후원아래 1945년 11월 북한내 5도 행정국 산하 보안대를 관할하는 보안을 조직하고 치안을 담당케 하는데서 시작됐다.


1946년 2월에는 평양보안학원, 1946년 7월에는 군 초급간부 양성기관인 중앙보안간부학교, 그 해 8월에는 보안간부 훈련소가 설립됐다.


1947년 5월 김일성은 보안간부 훈련소 전 장병들에게 계급장을 수여하고 이를 계기로 조선인민집단군을 공식 표방 하였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정식으로 조선인민군 창립이 선언 되었다.


김정일은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선군정치’ 노선을 내세우며 인민군을 체제유지의 첫째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 처럼 과시하고 있지만 실제 인민군은 김정일 개인 경호에 치중하는 호위총국이나 보위사령부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의 공식 주장과 달리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항상 군부를 두려워하고 군부장악을 내치(內治)의 첫번째 목표로 삼아왔다.


해방직후 ‘북조선노동당’에는 군대를 담당하는 부서나 책임자가 없었다. 북조선노동당은 군대 내에서 여러 정당중의 하나였을 뿐이며, 군대에는 당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외형상으로 군은 당으로부터 자율성을 보장 받은 것처럼 보였고, 당과 군대는 공식적, 조직적 유대없이 각각 독립적으로 창설되고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김일성이 시작한 ‘피의 숙청’이 60년이상 이어지면서 북한 인민군은 김일성-김정일 개인군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김일성은 유엔군의 6.25참전 이후 평양을 잃고 후퇴하게 되면서 전쟁 작전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중국인민해방군 팽덕회에게 맡기고 자신은 인민군 내부 정적들을 하나씩 숙청해 나갔다. 그 첫 번째 군인이 바로 무정이었다.


중국 항일연군 참가자였고 중국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을 거쳐 포병단장을 역임했던 무정은 6.25때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했으나 북한군 후퇴시기 평양 방위사령관으로서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중국 선양으로 도피했다는 책임이 지워져 후방부대인 제7군단장으로 쫒겨갔다.


이후 치료를 잘 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군의관을 총으로 쏴 죽이는 사건으로 제7군단장에서도 해임돼 1952년10월 중국으로 들어가 병사했다.


무정이 해임 사건으로 김일성은 모택동의 항의를 받게 되는데, 김일성은 자신의 지시로 무정의 해임을 주도했던 허가이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그를 해임했다.


김일성은 6.25후퇴 시기 허가이가 북한 후방에 있던 많은 노동당원들을 과도하게 처벌해 60만 당원이 45만으로 줄어들었다는 명분으로 허가이를 노동당 제1비서에서 해임시켰다.


허가이는 농업부장으로 좌천됐다가 1953년 7월 미공군 폭격으로 무너진 순안저수지 복구사업을 현장 지휘 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불복하고 자살했다.


김일성은 정전 이후(1957~58년) 북한내 소련군 철수를 구실로 소련군 장교로 북한에 들어와 있던 유성철, 정상진 등 전 소련국적 고려인 장교 428명을 구소련으로 쫓아 내기도했다. 


60년대 이르러 김창봉이 제12사단장, 제7군단장(소장), 제2집단군사령관, 총 참모장(중장)에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의 길을 가게 되자 김일성이 다시 숙청의 칼을 꺼내 들게 된다.


숙청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위원, 민족보위상(대장, 현 인민무력부)을 역임하고 있던 김창봉은 노동당 총비서였던 김일성의 군부 통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한때 김창봉을 적극 신임 등용했으나, 그가 당시 20대 김정일의 존재를 자주 무시하며 김일성의 군부 통제를 반대하자 1969년에 열린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4차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김양춘, 허상학 등과 함께 ‘군벌주의자’로 내몰아 숙청하고 말았다.


당시 김창봉은 “조선인민군은 그 누구의 말도 듣지않고 오직 국가보위에만 힘써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군부내에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창봉 숙청을 계기로 김정일은 ‘군부내 김일성 유일지도체계’ 확립에 전념, 결국 김일성의 후계자로 낙점 받게 된다.
 
김정일은 1991년 12월 24일 ‘최고사령관’으로 등극하면서 군 통수권을 김일성으로부터 넘겨받아 군부를 완전 장악했고,  1993년 4월 9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 선군정치의 기초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인민군 내부에서는 1990년대 이후 세계정세에 주목한 전소련 군사아카데미 푸룬제 유학생 출신 장교들이 주도한 ‘구데타 기도’가 일어났다.


1992년 9월 9일 북한 정권 창건절을 맞아 준비된 군 열병식에서 주석단을 향해 포사격을 가하기로 계획했으나, 사전에 정보가 누설돼 안상호 상장을 비롯한 주동자들이 대거 러시아로 도피했다.   


김정일은 이 사건 이후 인민군 내에 정치, 보위, 작전부 등 세 개 부서를 신설하고 서로를 감시케 했다. 북한군 야전 군단에 명령이 전달되면 정치위원, 보위부장, 군단장 등 세 명 이상이 작전을 지휘하게 하는 이른바 ‘군단3부 통수권’ 실행시켰다.


군단3부 통수권은 김정일에게는 매우 유리한 방법이었는지 모르나 군단 내부에서는 사분오열의 분쟁과 서로를 불신임하고 출세를 다투는 결과로 작용했다. 


1994년 ‘제6군단 사건’은 바로 군단내 정치위원, 군단장, 보위부장 등의 갈등 구조 때문에 실패를 맛보게 된 경우다. 6군단 사건은 김정일 체제에 대한 함경북도지역 군부의 대규모 구데타 계획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구데타 참가 제안을 거부했던 제6군단장이 군단 정치위원과 보위부장의 결탁에 의해 독극물 암살을 당했고, 당시 군수총국장이었던 김영춘이 신임 6군단장으로 부임, 이 사건을 직접 다뤘다.


김영춘은 6군단장 부임하자 마자 원응희(당시 총참모부 보위국장)와 손을 잡고 철저하게 내사를 벌였다. 이후 약 10개월 동안 조사 끝에 6군단 내부에서는 수 많은 반란 혐의자들이 생겼다. 6군단 뿐 아니라 함경북도당 조직비서 등 군 장성들과 결탁했던 당, 행정 간부들도 모두 체포됐고, 가족들은 모두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졌다.


6군단 사건이 마무리 되자 김영춘은 크게 승진했다. 1995년 9월 김영춘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차수’로 진급했으며  총참모장에 오른다. 2000년에는 ‘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았다. 현재 김영춘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군 무력부장으로 김정일 총애를 받으며 군부내 실세 중에 실세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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