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배지 떼라하니 흐느끼는 北 연수단”

▲ 상해 엘칸토 태창공장으로 연수를 온 북한 노동자 12명이 휴일 단체 관광을 마치고 공장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데일리NK

1997년 9월 ㈜엘칸토 평양 진출을 위해 북한 노동자를 중국에 있는 엘칸토 공장에 연수시키는 일이 차근차근 진행됐다. 전편으로 바로가기

드디어 6일 북한 노동자 연수단이 베이징 행 국제 열차 편을 타고 평양을 출발했다. 7일 12시 베이징에 도착해 버스를 이용해 북한 대사관으로 가서 투숙했다. 8일 12시 항공편으로 북경을 출발해 예정대로 상하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필자는 6일 아침부터 마음이 들떠 있었다. 연수생 12명이 열차 편으로 평양을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고 직접 북경으로 마중을 나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베이징 행 아시아나 기내에서 ‘콤팩트’ 3개와 ‘립스틱’(입술연지) 3개를 3명의 여성 연수생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샀다. 베이징에 도착해 광명성경제련합회 북경사무소와 대사관에 신고하고 하루를 더 기다렸다.

7일 베이징역에 나가 일행을 마중했다. 대사관 버스로 떠나는 것을 보고 베이징사무소 대표인 ‘리치훈’을 만났다. 이 사무소에는 ‘리재철’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몇 년 전 “엘칸토”를 평양으로 진출시켜 보려고 애를 썼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찬구 선생이 일 다 해놓고 잘 되니까 자기의 공이 많다고 앞에서 설친다고 ‘리치훈’은 리재철을 못마땅해 했다.

돈과 배신을 생각한다면 이 짓을 어찌하겠나

‘리재철’은 보위부 소속 북경대사관 2등 서기관직으로 련합회의 관리 감독 역으로 파견 근무 중이고 ‘리치훈’은 북경 대표부 대표무역일꾼으로 항상 둘 사이는 라이벌 관계처럼 보였다. 소위 ‘끝발’은 리재철 이가 더 높았던 것 같았다.

실습연수생 12명은 오늘밤 대사관내 숙소에서 지내고 내일 아침 일찍 데리러 가야 한다. 8일 월요일 베이징. 당시 필자의 일기장 한 쪽을 소개하고 싶다.

‘밤새 선 잠을 잤다. 이것저것 공상이 찾아 들었다. 연수단을 어떻게 하면 아무런 탈 없이 기술습득을 잘 하게 해서 각자가 자신 만만하게 평양으로 돌아가도록 해줄까?(중략) 나는 왜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는가. 일을 성사시키고 나면 짧은 시간 내에 또 배신당하겠지.

돈과 배신을 미리 생각한다면 어찌 이런 애국적인 일을 할 수가 있겠나. (중략) 새벽 4신가 다됐는데, 잠은 더 자고 싶은데, 자리에 누워 보지만 자리가 불편하다. 어서 아침이 되어 연수단 일행들을 만나보고 싶다. 이 사람들은 대사관에서 잠을 편히 잤을까? 아니야 나처럼 잠을 설쳤을 거야. 이제 이들을 만나러 북한대사관으로 간다.’

일찍 연수생을 데리러 북한대사관으로 갔다. 대사관 직원으로부터 12명의 신병인수를 받아 서명해 주고 대사관 버스로 베이징공항으로 향했다. 만일 베이징공항에서 남한의 신문기자들이 북한사람들이 단체로 어디 가느냐고 사진이라도 찍어댄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왼쪽 가슴에 단 김일성 흉상 배지를 잠시 떼고 비행장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필자가 직접 떼라고 했다가 대사관으로 되돌아가자고 할 것만 같아 인솔자인 보위부 직원인 연수단 일원인 ‘김태이’에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그 순간 나를 칠 듯이 쏘아보면서 “안 됩니다!”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예상했던 바다.

김일성 배지 떼라니 무섭게 초다보는 북 보위일꾼

이 무렵 베이징공항에는 남한의 신문기자나 TV기자들이 항상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공항 가서 시끄러운 것보다는 잠시 불편하더라도 상해 공장까지만 그렇게 하자고 부탁했다.
침묵이 계속되고 서로가 아주 불편한 분위기가 된 채 공항은 다 와 가는데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태이 동무!! 이거 일 잘하자고 하는 것이니 이해하고 동무가 먼저. 어서요!” 태이가 힘없이 조용히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뒤 돌아서서 배지를 떼기 시작하자 전원이 조용한 침묵을 깨고 몇 사람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렸다.

‘김태이’는 수개월 전부터 평양에서 나를 안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나를 알고 있다. 나는 눈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공항수속을 무사히 끝내고 비행기를 탔다. 12명 전원이 비행기는 처음 탄다.

상해에 도착하니 오후 1시 35분이다. 정주권 이사와 다른 직원들이 마중 나와 반겼다. 약간은 어색한 표정으로 악수를 나눴다. 상해에서 태창공장 까지는 약 2시간 정도 더 가야 된다.

태창공장에는 태극기를 항상 게양 한다는데 걱정이 되어 정이사 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공장에 태극기 내렸느냐고, 이왕 이면 서로 불편하지 않게 해 주는 것도 이 사업을 성공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연수원들의 입장에서 많은 신경을 썼다. 비행기 멀미를 한 두 여자는 아예 자리에 누웠다.

엘칸토 중국 태창공장은 1996년 대지 1,000여평 건평500평에 두 개의 부속건물과 기숙사와 식당이 있었다. 150여명의 공원 전원의 점심과 야근이 있을 때는 저녁식사까지 제공하고 있는 아담하고 공기 맑은 곳이었다. 월 생산량은 남, 여 구두 합해 10,000여 켤레이다. 전량 중국현지에서 판매되며 북경과 상해의 매장은 화려한 장식으로 최신식 구두 또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도망자 감시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자

기숙사 방 배치는 연수단 단장 격인 김태이와 평양공장 지배인 방응삼 은 독방을 쓰게 하고 나머지는 한방에 두 세 사람씩 배정을 했다. 그리고 3명의 여자는 같은 방을 사용하게 했다. 나도 이들과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연수생들은 환영하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김태이가 싫어하여 가까운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출퇴근하기로 했다.

식당의 자리 배치는 현지공장에 파견 근무하는 한국인 기술자들과 1대1로 정했는데 처음부터 불편하다 하여 별도로 분리해 식탁을 정했다. 식사는 뷔페 형태로 마음껏 자유롭게 먹게 했다. 만일 한국기술자들과 섞어 놓았더라면 식사를 제대로 많이 못했을 거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별도로 식탁을 만든 것이 참으로 잘했다.

식사당번을 정해 식사 30분전에 미리 준비하는 일을 하게 했다. 빈 그릇은 스스로 갖다 놓게 하여 자율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줬다. 도착한 날은 서로인사도 하고 마음을 풀기 위해 환영회를 열고, 연수 일정에 대한 간단한 공식행사도 했다.

내일부터 아침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운동복과 운동화를 한 켤레씩 선물로 나누어줬다. 밤참을 준비해 언제든지 자유로이 먹을 수 있도록 했고, 여러 가지의 과일과 음료수 그리고 냉장고에는 한국의 소주와 중국의 맥주를 끊이지 않았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6시면 공장기숙사에 도착 방마다 두들겨 잠을 깨워 1시간 정도 양자강 하류방향으로 조깅을 시켰다. 이 시간에 애로사항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와 먹고 싶은 음식들을 말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준비하여 우선 음식을 많이 그리고 맛있게 먹게 해 줬다.

한 연수생이 처음부터 설사를 하기 시작했고 또 한 사람은 식사량이 아주 적었다. 나머지는 모두 건강하게 잘 먹었다. 저녁에 먹으라고 바나나와 귤, 사과, 삶은 밤이나 계란 등을 가져다 주었다. 이들은 담배도 참 많이 피운다. 실컷 먹고, 마시고, 마음껏 피워봐라. 어디 한번 해 보자! 김찬구가 이럴 때 너희들에게 잘해주지 언제 또 잘해줄 기회가 있겠냐고 생각했다.

상해 단체관람 때도 일행 철저히 감시

김태이(보위부 직원: 12명 관리 감독)를 위시해 전원이 8시에는 공장 회의실에서 그날의 일에 대한 이론교육과 교육용 비디오로 설명을 듣고 실습위주의 교육을 시작했다.

평양에서 구두공장에 근무하던 사람들을 뽑아 왔기 때문에 이해가 빨랐고 열심히 교육을 받았다. 갑피부분과 제화부분으로 나누어 하루 평균 10시간의 강행군에도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는 즐거움에 그리고 교육 후 평양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공장에서 새로운 일을 한다는 마음 때문에 정말 열심히 일을 배우는 모습들이었다.

북한 사람들은 잠자는 시간외에는 노력동원이다 뭐다 해 노동하는 것은 평생 습관이 되어 있어 10시간 일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안 됐다. 필자도 재단에서부터 신발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세밀히 배우고 실습도 빠짐없이 열심히 했다. 필자도 알아야 평양 가서 급할 때 기술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구두의 모양을 내는 과정에서는 관리 감독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과 제품검사에는 더욱 신경을 써서 배웠다. 문학평론가가 소설 잘 쓰는 것을 봤는가?

첫 일요일 단체로 시내 외출을 나갔다. 김태이는 눈을 부릅뜨고 한사람이라도 도망(?)갈 까봐 일행들 뒤에서 감시를 했고, 나 역시 단 한 사람이라도 사고가 생기면 큰일이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워졌다.

시골 백화점이라 별 볼거리는 없었지만 시장 통에 가서는 눈들이 두리번거린다. 그 많은 물건들이며 먹을 것들이며 와글거리는 사람들이며 정신이 없다. 완전히 딴 세상 보는 기분들일 거다. 머리 아프다고 돌아가자는 사람도 있었다. 껌과 사탕을 많이 샀다. 이날 쓸 돈을 중국 돈으로 얼마씩 줬다.

사고방지를 위해 잠 못자는 책임자

돌아오는 길에 1원(당시 한국 돈 100원정도)주면 타는 인력거도 타보고 공장 앞에서 기념으로 단체 사진도 찍고 독사진도 찍었다. 모처럼의 자유시간이 홀가분한 한 나절이었다.

아침 8시면 접착 일을 시작해야 하는 김태이가 안 보인다. 속으로 이 사람이 어디 도망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않는다. 방으로 달려가 보니 코를 골고 잔다. 술 냄새도 많이 난다. 알고 보니 밤이면 도망가는 사람이 있을까 봐 제 딴에는 밤잠을 설치고 감시하느라 피곤했던가 보다. 이해가 된다.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유달리 진로 소주를 즐겨 마시는 김태이는 밤에는 연수생들의 사고 미연 방지하느라 못 자고 낮으로만 자는 사람으로 아예 업무에서 제외시켰다.

이곳 기숙사에 처음 들어와서 식사 후 토하고 설사하던 사람도 창자가 익숙해 졌는지 다소 식사량이 많아졌고 소화도 비교적 잘 되는 듯 했다. 처음에는 전원이 소화제를 며칠씩 먹어야 했다. 특히 몸무게가 약 45kg 미만의 한 종선 과장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아예 식사를 고양이 밥만큼 먹었다.

몸도 왜소하지만 깡말라서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먹으면 설사를 해서 신경이 많이 갔다. 많이 잡수라고 하면 ‘원래 적게 먹는다고’ 식사 조정을 스스로 하고 노력 하드니 1주가 지나니 얼굴빛이 달라지고 살도 다소 찌고 허리도 많이 펴지는 것 같았다. 식사도 제법 많이 먹기 시작했다.

두 세 사람 빼고는 영양실조 현상이 있어서 매 식사 때마다 고기와 싱싱한 채소를 충분히 차렸다. 이제 돌아가면 언제 또 이렇게 푸짐하게 먹을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든 배탈 없이 많이 먹이려고 최선을 다 했다.

목욕도 매일 할 수 있도록 샤워시설을 특별히 잘 해 줬다. 아무튼 최선을 다 해 교육도, 식사도, 정성을 다 했다. 혹시나 지루해 할까 봐 점심을 먹고 나면 한 숨씩 잠자게 해줬고 잠자고 싶지 않은 사람은 휴게실에서 중국 TV를 보던지 운동장에서 족구며 배구로서 무료함을 채우고 자전거도 마음대로 타게 했다.

평양으로 전화도 하게 해 주고 평양 소식도 자주 전해 줬다. 밤늦게 배고플 때 마음 편안히 드나들 수 있도록 연수생 외에는 밤늦게 식당출입을 금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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