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가(家)와 북의 여성문제는 예민하면서도 구체적인 연관관계에 있다. 북의 여성문제는 곧 김일성의 처의 문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김일성의 처들은 북의 여성문제에 관여해왔고, 김정일의 부상(浮上)은 김일성 후처의 역할제한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북한여성문제는 그만큼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던 특수한 관계가 있다.
우선 김일성의 전처 김정숙이 생존할 때에는 그녀가 김일성의 본처로 떳떳한 만큼 북의 여성문제도 북한 정치사에서 당당하게 쟁점화(여맹 창립, 남녀평등권 법령 발표 등)되어 왔다. 김정숙은 김일성을 내조하는 것과 함께 북한 여성문제 쪽은 자신이 더 살펴봐야 한다는 인식(김일성 처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서도 그렇고)이 있은듯했다. 그녀는 해방 후 평양방직공장, 제사공장 등 여성노동자들이 집중되어 일하는 곳에 드문드문 나가 여성노동자들과 대화도 나누고 새 민주조선이 여성들에게 가져다 줄 선물에 대해 각인도 시켜 주었으며 김일성에게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재실태를 알려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김일성의 정열적인 여성편력으로 김정숙의 개인적 고민이 발생하였다. 특히 북조선 주둔 쏘련군 노마니꼬부 사령부 타자수로 있던 15년 연하인 김성애에 대한 김일성의 이성적 접근은 김일성 조강지처의 지위마저 위협할 정도였다.
김성애라는 여성 일개인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노마니꼬브 사령부의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는 절박한 정치적 이유가 김일성을 더욱 조바심 나게 한 듯 했다. 함경도 내기라면 손 사레 치던 평안도 출신인 김일성의 친가(만경대 일가) 쪽도 함경도 태생 김정숙보다는 평안도 출신 김성애 쪽을 더 반기어 손들어 주었다. 고독했던 김정숙은 난산임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을 일체 들이지 않고 방문을 안으로 닫아 건채 홀로 해산하던 중 숨을 거두었다(김정숙이 부부싸움 중 홧김에 쏜 김일성의 총알에 맞아죽었다는 설도 있음). 따라서 김일성의 후계자와 본처와의 정치적 알력, 나아가서 권력자 대 여성문제는 이때부터 범상치 않은 진통을 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가 있다.
김성애의 김일성 정실부인으로서 지위는 김정숙 사후 15여 년이 지나서야 공개되었다. ‘조선중앙연감’에 실린 북한 여맹 대회기록을 보면 북조선민주여성동맹 1차, 2차 대회는 명시가 되어 있지 않다. 3차 대회부터 조금 언급이 있기 시작한 것이 4차 대회에 이르러서는 대회 보고문까지 실릴 정도로 여성문제가 뚜렷하게 부각이 된다.
또한 북한 노동당 대회 역사를 봐도 여성문제를 기본과업의 하나로까지 본격적으로 등장시킨 대회는 여맹 4차 대회가 있기 한해 전에 열렸던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뿐이다. 이 대회 보고문에는 도시 여성과 농촌여성의 가정 부담을 덜기 위한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도시 여성들을 위해 부식물가공품의 공업화를 실현하고 전기밥가마, 냉장고, 세탁기 등을 대대적으로 생산하여 가정들에 공급해주며, 농촌 여성들을 위해서는 농촌 리의 수도화(농촌 여성들의 머리에서 물동이를 내리우기 위해), 버스 화를 제시하고 있다.
그 1년 뒤에 열린 여맹 4차 대회는 조선노동당 제 5차 대회가 내 놓은 의제들을 반복할 뿐이어서 당 제5차 대회에서 명시한 여성문제가 누구의 고안물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애매한 부분이 있다. 김일성의 창안품이 아닌가 생각될 수 있지만, 놓치고 넘어가서 안 될 점은 지금까지 열려온 당 대회들에서는 여성문제를 이렇듯 구체적으로 전면적으로 논의한 예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북한 내부 여성들 속에서는 당 제 5차 대회가 제시한 여성문제는 김성애 건의의 반영물이라는 설이 압도적이다. 여맹 4차 대회에서 행한 연설 중에 김일성은 여성대표들에게 의미심장한 약속을 한다. 여맹을 산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여맹 조직체계를 혁명적으로 개편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바로 여맹을 노동당 부서 직속으로 넣는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남성 인터뷰 대상자는 이런 말을 하였다.
“1973년도인가 74년도쯤에 여맹을 당중앙위원회 부서에 넣고 군 여맹도 당 안에 넣었어요. 그때 여성들의 지위가 아주 상승했어요. 여성들이 외화벌이도 하게 하자고 여맹 부서들에 자동차도 주고 지휘용 승용차도 주었어요, 그러니까 다른 부서들이 여맹 신세를 많이 지게 된 것 이예요.”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 이어 열린 여맹 4차 대회는 북한의 획일적인 1인 지도체제의 분열을 가져왔고 그것은 1인 지도체제에 습관된 일부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결과도 초래하였다. 다음의 인터뷰 사례는 이를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아유, 그거 여맹을 당위에 올려 세우고, 지방 당에서 여맹에 절절 기게 만들고, 여맹은 여맹 인데 뭐 당위에 올려 세워? 사회주의 체제는 분명히 노동당 1당 체제인데 여맹이 당위에 올라앉은 그것은 정말 잘못 된 거야. 게다가 김성애가 시 당을 자기 측근으로 꾸렸단 말이야. 자기 동생 김성갑을 시 당 조직부장으로 만들고 그 밑의 동생 김성윤이는 호위국 2국장으로 만들고, 아, 호위국 2국장이면 정무원 부장급인데 제가 뭐라고 정무원총리와 딱딱 반말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문제를 대회의 기본과업으로까지 등장시켰던 당 제5차대회는 북한 당 대회 역사 중 가장 실질적이고 현실성 있는 문제를 다룬 대회로 북한 주민들 사이에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고히 자리 매김 되고, 자기 어머니의 연적이자 자신의 정적(김성애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되는 것을 음으로 양으로 반대하였다)인 김성애와 그의 ‘일당’을 ‘곁가지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타진시켜버리자 북한 여성문제는 금방 기를 잃었다. 여성문제를 들고 나오면 김성애 동정자로 김정일에게 비추어지기가 십상인 탓이었다.
북한의 의식 있는 여성들은 북의 여성문제를 복귀시킬 수 있는 인물로 김정일의 누이동생 김경희를 지목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여성문제에 손을 대지 않아 실망을 자아냈다. 김경희의 입장에서 보면 계모가 명목상 쥐고 있는 여성문제에 자기가 촉수를 뻗치는 것이 어불성설로 여겨졌을 것이었다. 물론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가 여맹위원장으로 명목상 존재하는 이유도 있긴 하겠지만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김정일의 부인들이 있는데 자신이 나서기가 껄끄러울 것이다. 물론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현재 사망)이나 지금 중앙당에서 막강한 권력을 시위하고 있는 고영희는 여성문제를 전면에 들고 나올 만한, 즉 김정일의 정실부인으로서 확실하게 나설 만한 지위가 되지만 그들의 생애가 떳떳하지 못하다. 전자는 유부녀이고 후자는 자본주의 사회 태생 여성인 까닭이다. 또 현재 김정일의 ‘부인’으로 명명되고 있는 김영숙은 김정일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여성이다.
김정일이 표면화하기 두려워하는 이러한 내적인 사정들은 단지 북한의 여성문제를 넘어서서 북한사회의 생사존망에 영향을 미칠 변수로 작동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북한여성문제가 김일성 가에 장악됨으로써 북한여성문제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된 사실도 참고로 감안해 볼 수 있다.
최진이 / 前 조선작가동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