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영화배우’라면 김정일은 ‘감독’

북한과 같은 일인지배체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독재자 개인의 강력한 통치술이 뒤따라야 한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경우 대(代)를 이어 60여년간 북한을 지배하고 있지만 통치 스타일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일성이 항일빨치산 출신이라는 경력을 내세워 권력의 정통성에 기반한 통치술을 폈다면, 후계자인 김정일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자신의 정치적 경력을 보완하기 위한 통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북한 독재정권 유지의 동력이라 할 수 있는 김 부자(父子)의 통치스타일을 비교·분석했다.

◆ 수령이 모든 ‘정책’ 결정=북한은 일인 독재체제이기 때문에 모든 정책 결정도 최고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이뤄진다. 다만 김일성이 공산주의 국가의 시스템을 본 따 형식적이나마 합의적 성격을 정책 결정과정에 포함시켰다면, 김정일은 개인이 독단적인 판단을 더 우선시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허문영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일성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하의상달(下意上達. 아랫사람의 뜻을 윗사람에게 전달)식이 많다”며 “각 부서의 합의를 거쳐 정치국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형태는 국가체제 운용에 나름대로 공산주의의 국가들의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정치국을 활용하기 보다는 측근들을 통해 결정을 내린다”며 “친위 세력을 통해 보고체계 및 정책집행체계를 장악하고 문제처리시 해당 실무자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일성 시대가 형식적이나 합의적 성격이 있는 ‘위계 질서형 양두제 모델’이라면,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더욱 독단적인 ‘종횡무진 제왕형 모델’로 변화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김일성과 김정일 둘 다 지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전제 모델(the autocratic model)’”이라면서 “김일성이 정치국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는 편이고 김정일이 더 독단적이라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라고 말했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김일성의 경우 당과 국가를 창건한 측면에서 카리스마적 통치에 비중을 뒀다면 김정일은 제도적인 지위를 통한 통치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간부 기용 스타일 면에서도 두 사람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김일성은 주로 빨치산 출신들을 등용했고, 한 번 등용하면 오랫동안 기용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반해 김정일은 측근 중심의 정치를 펴면서도 의도적으로 경쟁구도를 조성하는 용인술을 펼치고 있다.

외교관 출신 탈북자 현성일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최근 펴낸 자신의 저서에서 김정일 정권의 대표적인 정책 결정과정을 ‘측근정치’ ‘밀실정치’ ‘비준정치’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는 “간부들 속에서 ‘영원한 측근도, 영원한 비측근도 없다’는 인식을 심어줘 지속적인 충성경쟁과 상호견제를 유지하는 것은 김정일의 측근정치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관리 수법”이라고 분석했다.

◆ 영화배우VS영화감독=부자지간이긴 하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은 개인적 성향이나 성품 면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김일성이 아버지같고 온화한 리더쉽의 소유자라면 김정일은 후계체제 구축 과정에서 정적들과의 경쟁, 곁가지들과의 투쟁 과정을 거치며 상당히 도전적이고 대담한 리더쉽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허 연구위원은 “김일성이 배우적 성향이 강하다면 김정일은 밖에서보다는 뒤에서 연출을 하는 사람”이라며 “김정일이 노련한 영화감독은 될 수 있지만 따뜻함을 보여주는 자애로운 어버이상을 보여줄 수 없는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김정일은 먼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은 없지만 목전의 이해관계를 타산하는 능력은 뛰어나며 대화에서 상대방의 약점을 포착하여 공격하는 능력도 강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김정일은 특히 권력 승계 이후에도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도의 선전기법을 사용하게 된다. 북한 TV나 라디오에서는 김정일의 육성을 전혀 내보내지 않는다. 김정일을 찍을 때는 카메라를 상향식으로 비추는 경우가 많다. 모두 다 자신을 신비하고 베일에 쌓인 인물로 포장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김일성은 수해 지역과 같은 재난 현장에도 직접 방문해 주민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김정일은 일반 주민들이 있는 곳에는 절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일성은 외국 인사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자주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망하기 직전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의 회담이 대표적이다. 1979년에는 쿠르트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과 면담을 갖고 이듬해에는 미국 하원의원 스티븐 솔라즈와도 만나는 등 서방권 인사들과도 꾸준히 접촉했다.

한편, 베일에 싸여 연막 전술을 펼치던 김정일이 대외 언론에 가장 많은 모습을 보여준 계기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당시 김정일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직접 공항에 나와 비행기 바로 앞에서 손을 맞잡음으로써 파격적인 행보의 첫 장을 열었다. 김정일은 준비된 행사와 멘트를 잘 소화해냈고 임기응변의 유머까지 과시했다.

극도로 통제된 대중노출과 그를 통한 신비감 조성, 카리스마의 조작은 바로 김정일을 오랫동안 권좌에 머물게 한 노하우라고 할 수 있다.

◆ 외교 무대에서도 ‘신비주의’=김일성과 김정일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외교정책 스타일도 꼽을 수 있다. 김일성이 외교 면에서 세련되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김정일 은둔적 이면서도 소극적인 외교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김일성은 중국과 옛소련, 동유럽 등 사회주의권과 제3세계 비동맹권과의 교류에 치중했다. 그는 특히 중·소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까지 활발한 외국 순방 기록을 남겼다. 1975년의 경우 4월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회담하고,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된 5월에는 아프리카 5개국을 순방할 정도였다.

1965년에는 수카르노 당시 대통령의 초청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 인도네시아 종합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중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때에는 김정일이 김일성을 직접 수행했다.

반면, 국제무대에의 노출도 자신의 국제적 신비감과 가치를 떨어드린다고 생각한 김정일은 중국과 러시아 정도만 방문하는 등 극도로 제한적인 해외 순방 외교를 펼치고 있다. 해외 순방시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는 것 또한 김정일만의 특징이다. 그는 평양에서 모스크바까지 왕복 2만km를 넘는 거리를 무려 24일에 걸쳐 열차로 오가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김일성에게도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만류했다. 황장엽 전 비서는 김정일이 테러를 두려워해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을 거론, “김정일이 자꾸 김일성에게 ‘비행기는 위험합니다. 기차타고 다니세요’라면서 자신도 기차를 타고 돌아다녔다”며 “김일성은 그렇게 겁이 없었는데도 (김정일의 말을 들은 후) ‘내가 허리가 아파서’라면서 기차를 타고 다녔다”고 말했다.

김 부자의 상반된 외교정책 스타일에 대해 이 연구위원은 “김일성 집권 시기는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기 이전이라 이들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가 조성됐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광범위하고 전방위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면서 “대표적으로는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비동맹외교의 활성을 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일성이 당시 국제정세의 영향으로 포괄적이고 다각적인 외교를 펼쳤던 것에 비해 김정일은 핵문제로 인해 국제적인 제재를 받는 등 국제사회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때였다. 때문에 본인이 할 수 있는 외교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며 “결국 대중·대러 관계에 치중하거나 DJ 정부 이후에는 대남관계에 집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회주의권 붕괴의 영향도 있긴 하지만 북한도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비동맹 국가들에게 이전과 같은 경제적·정치적 지원을 할 수 없었다”며 “이로 인해 아프리카 국가들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사이도 악화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허 연구위원도 “김일성은 냉전 시기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경제를 일으켜 세웠지만, 경제난과 외교난 등 안팎으로 위기에 직면한 김정일로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인민들 속으로…고도의 ‘자기연출’= ‘현지지도’란 원래 탁상행정을 배격하고 관계자가 직접 현지에 가서 사업실태와 문제점을 파악,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지금은 김일성과 김정일 특유의 정책지도 활동만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 수령의 영도를 우상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용어 자체가 신성시 됐기 때문이다.

통일연구원 이교덕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김일성은 생전에 8천650여일 동안 57만8천km를 이동해 총 2만600여개 기관을 방문했다. 또한 김일성의 연평균 현지 지도한 단위 수나 일수는 김정일의 거의 2배에 이른다. 김일성이 평균 이틀에 한 차례 현지지도를 했다면 김정일은 4번에 한번 꼴로 한 셈이다.

현지지도 단위당 체류시간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평균 0.42일과 0.44일로 대체로 비슷하지만, 한 단위를 현지지도하기 위해 이동한 거리는 김일성이 평균 28.1km로 김정일의 89.9km보다 훨씬 짧아 김일성이 주로 근거리 위주의 현지지도를 했음을 보여준다.

분야별로는 김일성이 경제사회 등 비군사 분야 위주로 현지지도를 실시한 반면 김정일은 군사 분야에 치중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김정일의 현지지도도 1994년 이전에는 주로 문화예술분야에 치중돼 있었으나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군사부문에 대한 현지지도가 62.6%를 차지하는 양상이다.

이 연구위원은 “김일성은 현지지도를 통해 주민들과의 친근한 이미지를 과시하려는 측면이 있었다”며 “그러기 위해 경제시설이나 인민생활에 많은 관심을 돌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본인의 정치적인 에너지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현지지도를 활용하고 있다”며 “김정일이 주로 군부대를 방문하거나 예술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당면한 국제정세의 영향도 있지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본인 스스로 활력을 얻기 위한 이유도 있다”고 덧붙였다.

허 연구위원도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출신이자 한국전쟁을 이끈 지도자로 북한 주민의 자발적인 존경을 얻을 수 있었다”며 “또한 스스로의 품성이 따듯하다는 것을 잘 위장해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역사적 경륜이 없기도 할뿐더러, 성격적으로도 김일성보다는 차가운 편”이라며 “이러한 품성의 차이가 현지지도에서 나타나고 있다. 김일성이 대민(對民) 접촉에 좀 더 치중한 반면, 김정일은 군부대 방문 등을 통해 강력한 지도자상을 심는데 주력했다”고 분석했다.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