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을 김정일보다 부정적 평가하는 이유?

북한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하면 ‘둘 다 나쁘지만 김일성은 조금 더 나았다’는 의견을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필자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필자는 김일성도 김정일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김일성은 아들보다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 기사에 이런 평가의 근거를 보여주고 싶다.

최고지도자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최고지도자의 영도 하에 국민의 생활 수준과 자유 정도의 변화를 보는 것이 객관적인 방법인 것 같다. 

북한에서 1956년 8월 ‘종파 사건’ 실패를 실제적인 ‘김일성 시대’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김일성은 이때부터 정적을 숙청하며 수령독재 체제를 완성해나갔다. 1956년부터 1994년 7월 8일 사망 때까지 김일성은 북한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펴보자.

1) 김일성은 출신 성분제도를 성립하였다. 출신성분은 북한 주민들의 선친들이 일제 강점기 및 한국전쟁 당시 활동에 따라 분류시킨 카스트제도다.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주민들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평양에 살 수 없고, 고급 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2) 김일성은 조직생활제도를 성립하였다. 북한 주민은 매주 몇 번씩 의무적으로 모임에 참석해야 하는데 이 모임에서 김 씨 가족의 위대성에 대해 강연을 듣고, 동무비판 및 자아 비판을 해야 한다.

3) 김일성은 1967년 유일사상체계를 도입하였다. 유일사상체계는 북한에서 김일성의 사상 이외에는 다른 사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북한에서는 자유로운 시민사회가 형성될 수 없게 만들었다.

4) 김일성은 북한에서 여행증 제도를 도입시켜 주민들은 허가 없이 다른 군(君), 시(市)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다.

5) 김일성은 정치범 수용소를 만들었다. 북한의 일반 범죄자를 수용하는 교화소는 소련으로부터들여온 것이지만, ‘관리소’라는 정치범 수용소는 북한만의 독특한 것이다. 관리소 완전통제구역 수감자들은 사실상 노예와 다르지 않다.

6)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의존하는 기생 경제제도를 성립하였다. 광복 이후에 남한은 미국으로부터,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남한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 지원을 받아 자국의 경제를 발전을 이룩했지만, 김일성은 그렇지 않았다. 1990년대까지 외국 지원에 의존한 북한 경제는 1990년대 말 대기근의 결과를 가져왔다.

7) 김일성은 권력 세습 제도를 세웠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잘못된 통치를 했어도 김정일은 백두 혈통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아버지의 통치 방식을 비난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권력 세습 제도로 북한의 개혁 가능성을 매우 낮게 만들었다.

이처럼 김일성이 북한 주민의 생활을 더 번영하거나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제도는 찾아볼 수 없지만,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한 가지 조치는 있었다.

바로 라진-선봉 경제특구 지정이다. 중국을 번영한 나라로 만든 ‘개혁-개방’ 정책은 경제 특구를 신설하면서 시작됐다. 김일성도 북한에서 경제 특구를 신설하는 동기가 되었다. 라진-선봉 특구에 대한 투자 프로젝트는 김정일 시대에 실행되었지만, 북한 역사상 첫 경제특구인 이 특구는 김일성 시대에 성립된 것이다. 

김정일 역시 김일성의 통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며 유일독재를 완성했다. 하지만, 2002년에 개혁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 김정일은 탈북자 문제에 있어서 가족 책임제도를 최소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일성 시대에 정치범, 탈북자 가족을 수용소에 보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김정일 시대에 탈북자의 가족까지 탄압하는 것은 줄어들었다는 평가다. 

2) 김정일은 비록 ‘사이비 자본주의’라 할 수 있지만, 7.1경제개선 조치를 단행했다. 2002년 7월 1일에 실행된 ‘7.1조치’는 장마당 존재를 인정하는 모양새를 보였고, 식품뿐만 아니라 일반 상품도 거래할 수 있도록 했다.

3) 김정일은 남한과 개성공업지구 신설을 합의했다. 이로 인해 북한 주민 수 만 명이 일자리를 얻게 됐고, 북측 개성공단 근로자들은 부분적으로나마 남한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됐다. 

4) 김정일은 개성 및 금강산 관광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김일성 시대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2003~08년 사이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제한적이나마 북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5) 김정일은 신의주 특별행정구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2002년에 김정일은 네덜란드 국적을 가진 화교 실업가 양빈과 신의주에 홍콩이나 마카오와 같은 특별행정구를 설립을 합의했다. 하지만 양빈이 중국 당국으로부터 체포돼 신의주 특별행정구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6) 김정일은 북한 예술을 다소 자유화시켰다. 김일성 시대 유일하게 허용된 예술 스타일은 소위 ‘사회주의 현실주의’이었는데, 김정일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왕재산경음악단의 젊은 여성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나와 공연한 것이 대표적이다.

북한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악화된 것은 김정일의 잘못된 결정 탓이다. 바로 2009년에 단행된 ‘화폐개혁’이다. 화폐개혁 때문에 북한에서 국내통화(북한 원)가 팽창돼 주민들이 보유했던 수많은 돈이 휴지조각이 됐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하는 것은 훌륭한 지도자와 못 된 지도자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두 지도자는 북한 주민보다 자신의 권력 유지에 집중했다.

그런데 김 부자의 통치 방식은 차이가 명확하게 있었다. 김정일은 북한 주민들을 위한 정책을 최소한으로 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은 김정일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고 하지만, 자신의 수령독재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에 몰두했다. 김일성을 김정일보다 더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