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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대기근이 발생한 지 10년 째다. 길게 잡아 김일성이 사망한 94년부터 98년까지 5년간, 짧게 잡으면 95년~97년까지 3년 동안 북한에서 식량난이 직,간접적 원인이 되어 아사, 병사, 장기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한 주민은 수백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아사자 수와 관련, 한국정부의 공식발표 20여만 명(이종찬 전 국정원장 발언)을 비롯하여, 2백만명설, 4백만명 근접설 등 큰 차이를 보여왔다. 美 존스 홉킨스대와 시민단체 등은 3백만 명 정도로 추산한 바 있으며, 이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증언한 북한의 노동당 조직지도부 책임간부의 설명과 일치되어, 지금은 3백만 명 아사가 가장 유력하다.
아사자 수도 중요하겠지만 문제는 대기근 10년이 지났는데도 지금 북한의 식량난은 근원적으로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DailyNK는 대기근 10년 째를 맞아 북한의 기근문제 전문가와 90년대 중반 대아사 기간을 체험한 북한출신 기자가 직접 만나 지금도 진행중인 북한기근의 실태와 해결방안, 그리고 체험적 식량난 등 쌍방 확인토론을 가졌다.
정광민 박사는 북한의 기근문제로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국내 대표적 기근전문가로 ‘북한기근의 정치경제학’(도서출판 시대정신)의 저자. DailyNK 한영진 기자는 평양출신으로 2002년 입국했다.
정박사는 북한 기근의 연구방식에서 기존의 FAD(Food Availability Decline) 접근방식, 즉 식량의 총급량이 감소하여 기근이 발생한 것에 주목하였다는 접근방식에서 벗어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에 주창한 FED(Food Entitlement Decline) 접근방식, 즉 제도와 시스템이 기근에 미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주목을 받았다.
3백만의 죽음 앞에 너무나 태평한 사람들
한 : 만나서 반갑다. 이력이 독특한 것 같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북한기근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정광민 박사 |
정 : 80년대 중반에 ‘강철서신’이라는 팜플렛과 함께 노동운동계에도 주체사상과 NLPDR(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 노선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나도 당연히 관심을 갖고 살펴보았는데 주체사상의 수령관과 NL이론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 등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북한에 대한 연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일본 유학중 북한의 기아문제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한국 학계에서 연구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래서 불모의 영역에 도전하게 됐다.
한 : 한국에 와서, 교통사고로 몇 명이 죽은 것을 갖고 요란하게 떠들고 여중생 두 명이 죽었다고 촛불시위까지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것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북녘에 있는 동포 3백만 명이 굶어 죽은 사실조차 모르거나 그 이유를 캐묻지 않은 것에 또 한번 놀랐다. 작은 죽음에는 요란하고 큰 죽음에는 왜 침묵하는지 모르겠다.
정 :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 2천명이 죽은 사건이 한국사회의 80년대를 뒤흔들어놓았다. 사실 2천명이 아니라 2백 명이었는데, 하여간 20년이 넘도록 한국 386 정치인들의 기본 정서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을 따지고 살피면서 국회에서 청문회를 하고 재판까지 했다.
그런데 수백만이 굶어 죽은 북한의 기아에 대해서는 그냥 ‘식량이 없어서 기근이 발생했다’고 간단히 넘겨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북한의 기근에 대해서는 지금은 연구가 부족하지만 나중에 북한 사회에서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
한 : 나는 북한에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는 대아사 시기를 직접 겪었다. 북한을 탈출하고 보니 3백만명이 죽었다고 하던데, 충분히 그 정도는 죽었다. 정말 끔찍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쓰레기통에도 죽은 사람이 처박혀 있었을 정도니까.
정 : 식량난 시기에 어디에 살았나?
한 : 평양에 살았다.
정 : 평양도 그렇게 식량난을 겪었나?
한 : 그렇다. 평양도 외곽지역은 심각했다. 60세 이상 노인이 많이 죽었다. 피골이 상접한 채로 역전에 할일 없이 나와서는 굶어 죽고, 아이들도 무수하게 죽었다. 트럭이 지나가면서 시체를 가득 담아 어딘가에 묻어버리곤 했다. 김일성이 죽고 유훈통치 3년 동안에 다 죽었다. 고대에 왕이 죽을 때 노예를 합장하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조선의 상왕(上王) 김일성이 죽으면서 3백만 인민을 거두어 합장한 것이다.
북한 기근은 민주주의 부재 탓
정 : 김일성과 3백만 인민이 합장되었다는 표현이 슬프면서도 흥미로운 표현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 : 장사를 했던 사람들, 눈치가 빨랐던 사람들, 당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하여간 순박한 충성분자들이 가장 먼저 죽고, 그 다음에 게으른 사람이 죽었으며, 그리고는 병들고 약한 사람들이 죽었다. 그렇게 3백만 명이 굶어 죽고 나서야 북한 사람들은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지금도 식량사정이 특별히 나아져서가 아니라 이미 죽을 사람은 다 죽었기 때문에 대량아사가 없는 것이다.
▲ 정광민 박사의 저서 ‘북한기근의 정치경제학’<출판:시대정신> |
정 : 북한기근에 대해 연구하면서 내가 궁금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똑같이 기근을 겪었는데 살아난 사람은 왜 그랬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가 아니라 식량을 획득하고 소유하는 과정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연구하다보니 식량배급에 있어 지역차별과 계층간 차별이 있었고, 인민경제와 별도의 수령경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한당국은 90년대 중엽의 식량부족을 홍수 등 천재(天災)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FED 접근방식으로 보면 집단농업의 제도상 문제, 자력갱생형 개발과 관련된 수입력의 제한, 군사공업 우선에 의한 식량무역의 제한 등이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FED 방식을 주창한 센 교수는 인도에서 벵골만 기근을 직접 체험한 사람으로, 식량의 절대량 부족이 기근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한기자도 북한의 식량난을 체험해보았으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 : 나는 김정일의 일본인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가 쓴 책을 보고 김정일에 대한 분노로 몸을 떨었다. 후지모토 겐지가 김정일과 승마를 하고 사격을 하던 때는 1990년대 중반이다. 인민들이 무수히 죽어나가던 때다. 그때에도 그는 변함없는 호화생활을 즐기고 있었다니, ‘나쁜놈’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 얼마 전 수해가 났을 때 이해찬 총리가 골프를 치고 있었다 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이렇듯 재해시기에 공직자가 골프만 쳐도 언론에서 떠들고 난리다. 북한에 제대로 된 언론이 있었다면 북한 정권이 지금 존재할 수나 있겠나. 결국 북한 기근의 원인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연구를 하다가 황장엽 선생이 “김일성 사후에 선대(先代)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승한다는 명목의 사업에 8억 달러를 투입했다”라고 증언한 것을 듣고 놀랐다. 그 돈이면 곡물 600만톤을 수입해 주민들의 3년간 식량을 해결할 수 있다. 결국 북한의 그런 특이한 체제가 주민들을 굶겨 죽인 것이다.
대북지원활동을 하는 어떤 분을 만나니 “솔직히 북한을 왕조체제라고 생각한다”고 조용히 털어 놓더라. 북한의 식량난은 민주주의가 없기 때문에 발생했다.
당장 집단농 제도만 폐지해도 식량문제 해결될 것
한 :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엄밀히 따져 보면 사회주의가 아닌 것이 아니라, 그냥 딱 보아도 사회주의가 아니다. 북한의 경제를 보자. 당경제, 군수경제, 인민경제가 따로 존재한다. 인민경제는 가장 후(後)순위고, 김정일의 비자금인 당경제가 1순위이다. 비자금을 빨아들이기 위한 노동당 39호실이 지방 당조직에까지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 절대왕조 시절에도 이런 식으로 경제를 오직 한 사람을 위한 구조로 만들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이것을 사회주의라고 하겠는가.
정 : 나라 전체를 개인의 소유로 만들어 놓은 것을 사회과학에서는 ‘가산(家産)국가’라고 하는데, 북한은 역사 이래 가산국가라는 개념에 가장 근접한 국가로 기록될 것이다. 국가의 공권력, 경제력, 문화적 지배력 등 어느 것 하나 권력을 공동소유하지 않고 오로지 김정일에게 집중되어 있다. 북한에 있을 때는 이런 체제의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나?
한 : 전 세계가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철저한 폐쇄와 세뇌의 탓이다. 그러다 식량난을 겪으면서 많이 각성되었고, 중국에 와보고서야 내가 완전히 속아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식량난이 주민들에게 준 단 하나의 긍정적인 영향은 ‘체제의 문제점을 깨닫게 만들어 줬다’는 것이다.
정 : 그런데 왜 북한 주민들이 봉기나 투쟁을 하지 않나?
한 : 잘 알지 않나(웃음). 김정일의 부인이 3명이라는 이야기를 부인에게 몰래 해도, 그것이 어떻게 보위부에 흘러들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곳이 북한이다.
선생님은 북한기근을 연구하셨으니까, 북한의 기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이고, 해결의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 : 북한의 식량난은 수령경제의 근본적 모순이라는 원인을 기둥으로 하면서 ▲사회주의 무역체제 붕괴 ▲자연재해 ▲토지의 산성화 ▲농기구의 부족과 수리 개선 미흡 ▲자력갱생 노선의 실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발생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다른 사회주의 사회도 다들 조금씩 겪었던 문제들이다. 정상적인 지도부라면 재빠르게 기근을 예측하고 국제기구에 원조를 요청하고 개혁개방 노선으로 전환을 했을 텐데, 북한은 3백만 명이 죽고 나서야 그런 조치를 취했다. 개혁개방은 뚜렷한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 결국 일단 1차적인 해결책은 지금이라도 개혁개방 노선으로 과감히 전환하는 것이다.
단계적 조치로서 일단 무역이든 원조든 공급을 늘이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핵개발을 하고 선군혁명노선을 내세우면서 고립을 자초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조치도 시급하다. 따라서 도시영세민들에게 식량배급을 우선적으로 해 줄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하는데 투명한 지원분배가 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국제사회에 공개하는 식량생산량이 자꾸 과대, 혹은 축소되고 있는 것 또한 문제다. 국제사회에 정직하지 않고서는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을 북한 정권은 깨달아야 한다.
▲ WFP관계자들이 북한 어린이들의 식량 상황을 직접 확인하는 모습 <사진:WFP> |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정치 경제 시스템이 민주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역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대량 아사가 없었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 보이고 있다.
한 : 당장 집단농 제도만 폐지해도 상당히 수확량이 증가할 것이다. 또한 선군노선만 포기하면 인민경제 부문이 살아날 것이다. 내 생각도 정선생님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는 정치 경제 시스템이 바뀌는 것이 북한의 식량문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 남한에 왔고, 지금 부지런히 북한의 진실을 알리고 있다. 선생님의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정 : 이번에 쓴 책은 북한 연구의 첫걸음일 뿐이다. 앞으로 북한의 수령경제론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서 변질된 북한 사회의 구조를 파헤쳐 보고 싶다. 북한의 변화와 발전에 내 연구가 일조했으면 좋겠다.
정리 : 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