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보다 항일운동의 정통성을 지녔던 최현

최현은 1907년 음력 6월 6일 중국 길림성 훈춘현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득권이었다. 그의 부친은 최화심(崔化心)으로 당시 독립운동을 펼쳤던 홍범도 부대의 일원이었다. 독립군 집안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훗날 북한 정권을 장악한 김일성의 동료들 가운데서도 최현은 유일한 독립군 출신이었다. 출신 성분에 있어서도 최현은 항일운동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와다 하루끼,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비평사, 1992), p. 302-3.

이상의 분류에서 와다 하루끼가 김일성의 출신성분을 한방의로 구분한 점이 다소 의문스러울 수도 있다. 그것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이 1926년 간도 지방으로 넘어가 잠시 한의원을 차렸던 경력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최현은 글을 모르는 일자무식의 군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아홉 살 때 구학서당을 다닌 적이 있었고, 그 후 유격대 시절 한글을 배웠으며 중국어에도 유창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중략) 감옥장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룡정 영신녀자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놀고 있었다. (중략) 한 번은 그 여자가 머리를 깎으러 와서 나보고 중국 사람인가고 묻더니 조선 사람이란 말을 듣자 놀라는 표정을 하며 말하였다. ‘어떻게 중국 말을 그렇게 잘 하는가.’ 나는 그를 떠보느라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중국 사람들과 공동으로 싸우자면 우리도 중국말을 알아야 할 게 아닌가?.'”–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7’ (조선로동당출판사, 1962), p.109.

1920년 경신참변 때 어머니를 여읜 최현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체현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깊은 원한을 지니게 됐다. 독립군이었던 아버지 최화심이나 홍범도, 임병국 등 독립군 간부들의 영향도 최현의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했던 사건은 최현이 항일유격대 활동에 가담하게 된 결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중략) 특히 일본 침략군에 의하여 나의 어머니를 빼앗긴 사실은 원수들에 대한 나의 원한을 어릴 때부터 골수에 사무치게 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나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일본놈을 미워하는 반일 사상으로 성장하게 하였으며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품게 하였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국립출판사, 1964), p.12.

1926년 소련 국경의 능창에서 ‘동만청춘’이라는 혁명조직에 처음 가담한 최현은 공산주의 투쟁 강령을 접하면서 사상적으로 적화되어 갔다. 이때 그는 주로 경제 ‘모연(모금)’ 공작과 삐라살포를 담당하다가 중국 육군대에 사로잡혀 연길 감옥에 수감된다.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7년형을 살았다. 옥중에서도 최현은 ‘반제동맹’과 ‘적위대’라는 조직에 가입하면서 정치범들의 탈옥 공작을 비롯한 옥중투쟁에 전념했다.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7’에는 최현의 연길 감옥에서의 일화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연길 감옥에서의 최현의 활약상은 그가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가담했고,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된 시기는 김일성보다 오히려 빨랐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항일경력이 김일성과 대등했고 그 업적에 있어서는 오히려 김일성보다 다양하고 월등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조금 길게 인용해보자.

“1926년, 나는 고향인 훈춘현 훌루투거우에서 맑스주의의 소조 ‘동만 청춘’의 한 성원으로 경제 모연 공작, 삐라 공작 등을 하다가 백가장놈의 고발로 체포되어 무기 징역 언도를 받고 연길 감옥에 감금되었다(당시 20세). 나는 일생을 철창 생활을 하게 된 것이 원통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도 더 원쑤들과 싸우지 못 하게 된 것으로 하여 가슴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중략) 독립군 사건으로 들어 온 10여 명의 조선 사람을 제외하고는 정치범이란 없었고 모두가 잡범들이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변소에서 독립군 대장 임병국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홍범도의 전우로서 우리 아버지와도 늘 련계를 가지고 활동했던 만큼 내가 어릴 때에 우리 집에도 여러 번 왔었고 또 아버지의 련략을 가지고 내가 그에게 여러 번 찾아간 일도 있었다. 그는 나를 얼른 알아보지는 못 하였다. 내가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하여서야 비로서 나를 알아 차렸다. ‘너도 감옥에 갇히고 말았구나! 청년들은 시대를 따라야 한다! 참 장하다!.’ (중략) 그때 나는 석판 인쇄 공장에서 일하였는데 그곳의 간수와 경리원을 끼고 종이, 먹, 인쇄 잉크 등을 내다 팔아서 공작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어 썼다. 그 돈으로 앓는 동무들의 약과 입에 맞는 음식물도 사들여 왔고 간수들과 간수부장에게도 먹이면서 그들과 친근해졌다. 당시는 아직 왜놈들의 손이 여기까지 미치기 전이여서 중국 감옥은 좀 어수룩한 데가 있었고 간수들과 간수부장들도 속으로는 우리 정치범들을 존경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조건을 리용하여 그들과 더욱 친근해지면서 혁명적 영향을 주기에 노력했다. (이들 중 평가 성을 가진 간수부장과 리 간수부장은 나중에 유격대에까지 참가하여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 바로 이런 때에 만주 군벌 장 작림이 ‘륙군 대독’이 되면서 대사령을 내리여 잡범은 다 석방되고 우리들은 ‘관속’ 6년으로 감형되었다. ‘관속 죄수’란 놈들이 소위 국가적으로 우대하는 것인데 고랑과 족쇄도 채우지 않고 면회도 언제나 시키고 변소에도 마음대로 다니게 하였다. 우리는 이런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감옥 내 ‘죄수’들에게 더욱 광범히 반일 사상을 전파하면서 악질적인 감옥 직원들과 투쟁하였다. (중략)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만에서 혁명 운동이 앙양됨에 따라 감옥에는 정치범,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는 감옥에서 공산주의자라고는 윤 창범과 나 뿐이였는데 이제는 거의 매 감방에 우리 동무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들은 들어오자 즉시로 나와 윤 창범을 찾았다. 하루는 변소에 가는데 한 동무가 나에게 눈짓을 하였다. 슬그머니 따라 가니까 종이 쪽지를 남몰래 주고 갔다. ‘우리들은 혁명을 하다가 잡혀 들어 왔다. 당의 지시로 감옥 내에 혁명 대렬을 조직한다. 동무도 참가하라. 00 동무를 만나 보라.’ (중략) 나는 벅찬 가슴을 안고 쪽지에 지적된 동무를 감방에서 불러 내어 리발실로 데리고 갔다. (중략) 그 동무는 감옥 내에 ‘반제 동맹’ 지부와 ‘적위대’를 조직할 문제, ‘죄수’들에게 반일 사상을 더욱 고취시킬 문제들을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감옥 내에는 당의 지도 밑에 혁명 조직이 생기게 되었다. 나에게는 감옥 안의 내부와 외부와의 련략 임무가 맡겨졌다. 나는 감옥 안의 매개 감방에 조직의 결정 지시를 알려 주었다. (중략) 집단적인 탈옥, 수백 명 ‘죄수’들의 일치한 단식과 같은 조직적인 투쟁에 누구보다도 질겁한 것은 왜놈들이었다. 놈들은 감옥 내 조직을 알아 내려고 눈이 뒤집혀 날뛰었다. 감방마다에 왜놈들이 박아 넣은 밀정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밀정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치우곤 했다. 변소 간에서, 담장 밑에서 처단된 밀정들의 시체가 아침마다 나오곤 하였다. 나중에는 왜정의 밀정을 열병보다도 더 싫어하였다. 이렇게 되자 왜놈들은 다른 방법으로 복수하기 시작하였다. 놈들은 정치범들이 감옥에서 석방되면 감옥 문을 나서는 길로 테러단을 붙이여 아무도 모르게 암살해 치우곤 하였다. 숱한 혁명가들이 이렇게 희생되었다. 바로 이런 때 1932년 7월, 윤창범, 방정준 동무들과 같이 나는 만기 출옥하게 되었다. 나는 감옥 문을 나서면서 새로운 투쟁 결의를 다지고 이름도 최득권을 최현으로 고쳤다.” –‘항일 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7’ (조선로동당출판사, 1962), pp.99~116.

위에서 인용한 최현의 회고를 전제로 할 때 그는 1926년에 연길 감옥에 투옥됐다. 반면, 김일성이 항일 활동을 하다 처음 체포됐다고 선전되는 시기는 1929년이었다. 김일성이 중학교 시절부터 공산주의 서클에 가담하여 이념활동을 했다면 최현 역시 19세 때였던 1926년 맑스주의 소조인 ‘동만청춘’ 회원으로 활동했었다. 최현은 동만청춘 회원으로 가담하여 경제 모연 공작, 삐라 살포 등 이념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중학시절 공산주의 이념활동에 관한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김일성은 17세였던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공산주의 이념활동을 본격 시작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와다 하루끼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이 가담하고 있던 조선공산청년회 주중청년동맹이라는 조직은 사실 국민부에 호의적이고 분명히 반(反) ML(조선공산당 레닌주의 동맹그룹)적 성격을 띤 서클이었다. 공산주의 이념서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백보를 양보해서 김일성이 항일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길림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는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그가 1929년 가을부터 이듬해 5월(일각에서는 3월이라는 주장도 제기됨)까지라고 옥에서 살았다는 1년도 채 안 되는 형기는 항일운동을 하면서 지은 죄의 경중을 충분히 말해준다. 그러나 최현은 옥중에서도 공산주의 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자 중국 공산당은 이념 조직의 확대와 당원 확보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된다. 이 같은 추세는 연길 감옥에까지 미쳤고 감옥 안에서 당의 지도하에 혁명 조직이 만들어지게 됐다. 상기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최현은 옥중에서 ‘반제 동맹’ 지부와 ‘적위대’를 조직했고 죄수들에게 반일 사상을 고취시키며 그들을 적화시키는 사업에 적극 가담했다. 심지어 최현은 정치범들의 탈옥 공작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중략) 1931년 봄, 감옥 내 ‘반제 동맹’ 지부에서는 파옥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결정에는 파옥을 통하여 우리와 연계를 맺고 있는 죄수들을 다 빼 내자는 것과 파옥은 봄부터 준비하여 곡식이 무성한 여름에 실행하기로 되었다. 나는 계속 이발을 하면서 파옥 공작 연락 책임을 지게 되었다. 나는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철공소, 목공장, 피복 공장들에 다니면서 족쇄를 벗는 데 쓸 수 있는 줄칼, 쇠꼬치, 가위다리 같은 것을 공작하여 감방마다 넣어주었다. (중략) 결국 우리들의 파옥 공작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 하였다. 몇 동무가 탈옥을 했지만 그 대가로 남은 우리들에 대한 감옥 측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우리가 이 투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지 못한 원인은 조직성이 미약하였고 일을 보다 신중하게,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하지 못한 데 있었다. 우리는 그날 밤 그렇게 앞뒤를 고려함이 없이 조급하게 지휘부 단독적으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다음 기회를 타서 집단적으로 파옥을 단행했어야 할 것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간수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수단도 강구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조직 책임자가 조직 군중을 고려하지 않고 더구나 전방적 탈옥 계획을 실현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당황하여 자기들만 탈옥을 단행한 것은 잘못이었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국립출판사, 1964), pp.37-40.

당시 최현은 탈옥 공작을 주도하면서 향후 유격대 생활을 할 때의 전략전술을 체득해갔다. 조직성의 강화 필요성이라든지 치밀한 계획, 대담한 추진 등 탈옥 공작을 추진하면서 최현이 깨달은 노하우는 그의 유격대 전투 과정에서도 종종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