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정치경력은 김일성 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조직지도부 부원으로 배속되는 1964년 6월19일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가 북한 권력내부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5월에 열렸던 당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였다.
당시 김정일은 그의 어머니인 김정숙과 깊은 인맥관계에 있던 김일, 오진우와 같은 항일혁명세력들에 의존하여 갑산파 숙청을 주도하면서 노동당조직지도부 부장으로, 김일성의 2인자였던 삼촌 김영주의 측근들까지 일부 제거했다.
1967년 5월 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 과장으로, 1970년 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 1973년 6월 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부장으로 거침없이 승진하였다.
하지만 이런 승진에도 불구하고 1970년 11월에 열린 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도 오르지 못했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김일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당의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당내 사상투쟁을 벌리면서 문학예술을 통한 김일성의 개인숭배 캠페인을 직접 주도하였다.
김정일이 권력계 핵심으로 등장한 것은 1972년 10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으로 선임되고, 1973년 9월 당중앙위원회 제 5기 7차 전원회의에서 노동당 비서국 조직·선전담당 비서로 발탁되면서 부터이다.
이는 당시 2인자였던 김정일의 삼촌 김영주가 건강상 이유로 업무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면서 노동당 내부에서 입지가 약화된 사정과도 연관이 있다.
김정일은 1974년 2월에 열린 노동당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당내 핵심권력기구인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이 되면서 후계자로 공인되었고, 이때부터 북한 내부에서는 그를 ‘당중앙’으로 호칭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1974년 4월 ‘당의 유일사상체계 10대원칙’을 내놓으면서 김일성의 독재체체를 이론적으로 완성하였고 여기에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라는 이론을 곁들어 ‘김일성의 사상에 기초한 김정일의 영도’라는 권력구조를 만들어 냈다.
정치적인 입지를 다진데 이어 경제적인 업적을 만들기 위해 1974년 10월부터 12월까지‘속도전’이라는 구호를 제시했고, 시한부 대중혁신운동인‘70일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70일 전투’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당내에서 경제관리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김정일의 지도능력은 경제 분야로까지 확산 됐다.
김정일의 후계자로 등장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김일성이 주도한 ‘내부작업’이다.
김일성은 당시 ‘공산주의자가 부자 세습을 할 수 있느냐?’는 대내외적인 여론을 의식해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부각을 매우 경계했다. 따라서 속도를 조절하며 후계자로서 김정일의 업적 차근차근 쌓도록 기회를 줬다.
김일성은 김정일의 계략에 의해 노동당 내부에 실권자들이었던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와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이었던 동생 김영주가 몰락하는 것을 묵인했으며, 1974년 2월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인되자 김영주를 당 내부 사업에서 손을 떼게 하고 부총리 직을 맡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80년 10월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는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선포, 이미 1970년대 내부적으로 확정된 사실을 세상에 공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김정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고, 북한 전역에서 김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아래로부터의 추대’가 진행됐다.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선포되면서 김정일은 당 중앙위 위원,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 조직비서, 당 중앙군사위 위원의 직무를 겸임하게 됐고 1990년 국방위원장으로 등장하면서 사실상 권력승계를 마무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놓고 볼때 김정일의 후계자 역시 ‘당-경제분야-군(軍)’을 아우르는 업적쌓기와 더불어 이른바 ‘당조직’과 ‘노동계급’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추대’를 거칠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