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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지병으로 사망했다. 한국 현대사 한 복판에서 격동의 시대를 함께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그 자체가 우리 역사의 한 갈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기에 살아서 행적에 대한 시시비비를 넘어 국민 모두와 고인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함께하고자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 전까지 민주화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와 겨루었으나 패배했다. 이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납치됐다. 생사의 기로에서 미국 등의 도움으로 고비를 넘겨 민주화 인사로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76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3년간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로 같은 해 7월 내란음모죄로 다시 투옥됐다. 전두환 신군부가 사형을 면해주는 대가로 정치적 협조를 제안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1985년 김영삼(金泳三)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다가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이후 그는 민주당을 창당하고 야당 정치활동을 재개해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또 다시 낙선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1995년 정치재개를 선언해 1997년 자유민주연합과 연대해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매우 상반된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는 2000년 6월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내 한반도 냉전 해소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정상회담 직전 5억달러를 북한에 불법 송금한 사실이 밝혀져 돈을 주고 정상회담을 샀다는 비판과 함께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대북송금 특검이 이뤄져 송금에 관여한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사태를 맞았다.
또한 6.15남북공동선언에서 첫째 항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함과 둘째 항인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함 등이 북한의 반외세 민족자주 노선에 부응하고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통일이라는 헌법 정신을 위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 켠에서는 남북화해와 통일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으나, 다른 한 켠에서는 김정일 정권에 일방적인 지원을 펼치면서 북한의 핵 보유를 방치하고 극심한 남남갈등을 불러왔다는 평가 또한 받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대 민주화의 불꽃을 지켜온 정치 지도자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두 번의 죽을 고비에도 타협하지 않은 의지가 그를 결국 대통령의 자리에 있게 했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김정일 정권을 적극 지원한 결과 한반도 핵 위기를 불러오고 북한 주민들의 처참한 삶과 인권에는 눈을 감았다는 비판이 따르게 됐다. 그가 남겨놓은 이 햇볕정책의 유산들은 우리 후대가 지고가야 할 커다란 짐이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격동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정치적 영욕을 모두 겪어왔다. 고된 삶의 짐들을 이제는 내려놓고 편히 쉬길 바란다. 또 그와 시대의 상처를 함께해온 가족들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