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관-힐, 3년여 협상 ‘불능화’로 마무리

지난해 9월2일 오전 제네바 주재 북한 대표부 안에선 북핵 6자회담 북한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사무실이 아닌 잔디밭에 앉아 각각의 통역만 대동한 채 단 둘이 대화하는 모습이 대사관 밖에 진치고 있던 취재진의 망원렌즈 카메라에 선명히 잡혔다.

두 사람은 그 전날 저녁엔 제네바 시내 한 프랑스 음식점에서 2시간 가까이 와인을 곁들여 만찬을 겸한 회담을 한 뒤 둘다 기분좋은 표정으로 음식점을 나섰으며, 김 부상은 얼굴이 제법 불콰했다.

2005년 7월9일 베이징에서 제4차 6자회담 개최 일정에 합의하는 것으로 첫 보조를 맞춘 두 사람은 이후 9.19공동성명, 비핵화 1단계인 2.13합의, 2단계인 불능화에 관한 10.3합의를 거쳐 이번에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해제와 핵검증체계 합의를 만들어 냈다.

두 사람은 이를 통해 불능화 단계를 부시 행정부 임기내에 마무리하고 미국의 새 행정부와 북한이 3단계 핵폐기 협상을 시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3단계 협상도 북한에선 김계관 부상이 대미 창구로 나설 가능성이 크지만, 김 부상이 힐 차관보와 다시 짝을 이룰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김 부상은 북한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오랫동안 대미 협상을 해온 노련한 외교관인 데다 북핵 협상으로 김 위원장의 막강한 신임을 받고 있고, 전문가를 쉽게 바꾸지 않은 북한의 스타일상 미국의 차기 행정부 상대에도 대표 선수로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1990년대 미국의 찰스 카트먼 한반도평화회담 담당특사와 협상 짝을 이뤄 국제외교 무대에서 ‘K-K 라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던 북한의 김계관 부상은 지난 3년여간 ‘김-힐 라인’을 구성한 데 이어 다시 3번째로 미국측 교체 선수를 상대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힐 차관보가 주도해온 대북 협상에 부정적인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가 당선될 경우 힐 차관보가 물러나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대북 협상을 중시하는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가 당선되면 민주당 부통령후보인 조 바이든 상원의원의 보좌관이자 북한 문제에 일가견이 있는 프랭크 자누지 한반도정책팀장이 힐 차관보 자리에 중용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김계관 부상과 힐 차관보는 각자 본국의 훈령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서로 얼굴을 붉히고 설전으로 헤어지며 협상에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각각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신임과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고비마다 협상의 불씨를 살리고 매듭을 풀어나갔다.

두 사람은 특히 6자회담이 북미 양자 대화에 의해 주도되는 틀이 완연해짐에 따라 방코 델타 아시아(BDA) 문제와 핵신고, 핵검증 등 주요 고비마다 베이징은 물론 평양과 워싱턴, 베를린, 제네바, 싱가포르 등을 옮겨다니며 양자접촉과 회담을 통해 문제를 풀어갔다.

지난해 초 BDA 문제 해결 때는 미국의 금융제재를 우려한 미국과 다른 나라들의 은행이 개입을 꺼리자 한국측이 미국의 중앙은행을 동원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해 실마리가 풀리는 등 김 부상과 힐 차관보간 협상에는 한국의 중재 역할도 큰 몫을 했으나, 현재와 같이 경색된 남북관계에선 이 역할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