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父子 항일무장투쟁 날조 ‘워스트 5’를 추려보니…

▲ 보천보 전투가 진행된 경찰관 주재소 현장. 총탄자국 둘레를 크게 표시해놓았다. <中 관광객 촬영>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역사는 북한정권 초기부터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고 있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소규모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의 해방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함에 따라 소련과 미국이 남북에 주둔하고, 일본이 퇴각한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정권 수립 초기에는 항일무장투쟁이 김일성이 다른 권력 엘리트들 중에서 최고 지도자로 옹립되는 명분으로 활용되었지만 6·25전쟁 이후에는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위해 조작, 선전됐다.

또 김일성은 자신의 빨치산 투쟁을 과장·선전하며 ‘혁명전통을 대를 이어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구실 아래 김정일에게 권력을 세습적으로 넘겨주기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 김정일 역시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선군정치에 대한 정당성의 뿌리를 항일무장투쟁에서 찾고 있다.

통일연구원 서재진 북한인권센터소장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험은 김일성에게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행운을 주었지만, 북한 주민과 우리 민족 전체에게는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한은 왜곡되게 신화화된 항일무장투쟁이 깨질 것을 우려해 정보 통제, 대외적 인적교류 통제를 지속했고, 항일무장투쟁의 논리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일본과의 수교를 포기하고 고립된 대외정책을 추진하며 경제적 고사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황장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전 노동당 비서)도 자신의 저서에서 “김일성 자신도 우리들에게 ‘우리가 무장투쟁을 크게 한 것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한 것이 안한 것보다 낫다’고 말한 바 있다”며 “어쨌든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겠지만 그것이 북한을 ‘해방’하는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이 선전하는 항일무장투쟁 역사는 상당 부분 왜곡·날조·과장된 것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5가지의 사례를 꼽아봤다.

◆ 3·1운동 영웅은 유관순 아닌 김일성 부친 김형직?

▲ 김형직이 항일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도강했다며 설치해놓은 평안북도 의주군의 ‘중골나루터’ ⓒ데일리NK

북한은 3·1운동이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을 선두로 평양에서부터 전개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은 1970년대 후반까지 3·1운동을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수십만의 서울 시민이 반일투쟁을 시작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기술해왔다. 그러나 1980년부터는 평양 장대제에 있던 숭덕여학교에서 수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북한 언론매체는 “이 날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울린 종소리를 신호로 김형직이 몸소 육성한 애국적인 청년학생과 인민을 선두로 10여만 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북한의 소학교와 중학교에서는 1917년 김형직이 결성한 ‘조선국민회’가 3·1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유관순 열사의 항일운동도 김형직이 지도한 결과라고 해석하고 있다. 심지어 3·1운동 당시 김일성이 7살의 어린 나이에 만경대에서부터 평양성까지 시위대열에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북한 정권은 김일성 뿐 아니라 항일 역사와 전혀 관계 없는 김일성의 아버지, 할아버지 등도 항일투사의 전형으로 묘사하며 이들에 대한 가계 우상화물을 북한 곳곳에 설치해왔다.

북한에서는 김형직을 “반일민족해방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킨 선구자”로 칭송하며 김형직사범대학, 김형직인민병원 등의 칭호를 붙였으며 양강도 북쪽에는 ‘김형직군(郡)’까지 설치됐다.

◆ 김일성 항일운동 최고 업적으로 포장된 ‘보천보 전투’

북한에서는 ‘보천보 전투’를 지난 50여년 동안 김일성의 항일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중요한 선전 자료로 이용해왔다.

북한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서강(西崗)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제시하고 행동에 옮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하였다. 거리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환영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이 교시했다는 연설문도 싣고 있다.

김일성 및 북한연구가들에 따르면,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은 90여명을 인솔하여 보천보를 습격했다.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등 뒤로 피하던 어느 경찰관의 딸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김일성은 총기고에서 경기관총 1자루, 소총 6자루, 권총 2자루,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다. 이어 농사 시험장, 삼림보호구,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보천보 전투는 전과로 치면 미미한 전투였다. 적의 무기를 탈취한 것이 전과라면 전과지만 2명의 민간인도 희생됐다. 북한 교과서가 보천보 전투의 구체적인 전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보천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 1군 2사, 4사와 2군 6사(김일성 부대)의 연합 부대의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부대 단독 작전인 것처럼 조작되어 왔다.

◆90년대 식량난을 ‘고난의 행군’으로 정치적 상징조작

김일성 부대는 보천보 전투 이후 1938년 말부터 일제 토벌대에 추격당해 장백현으로 이동했다. 1938년 12월~1939년 3월 사이 100일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몽강현으로부터 압록강 연안 북부 국경일대를 향해 이동하게 된다.

북한은 당시 김일성 부대가 일제 군경의 포위와 극심한 식량난,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등 헤아릴 수 없는 지독한 난관을 물리치고 행군을 벌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때 있었던 ‘고난의 행군’을 북한당국의 명백한 경제실정으로 인한 대아사 사태와 식량난을 호도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조작한 것은 이미 다 알려져 있다, 그렇게 해서 주민들로 하여금 현재의 경제난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을 당연시 하도록 하고 있다.

◆ 김정일 출생지, 생일도 조작

▲ 북한당국이 김정일이 출생했다고 주장하는 백두산 밀영의 귀틀집

일본 관동군 및 만주군의 공식기록 문서, 그리고 구 소련측의 기록에 따르면 김정일은 1941년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하바로프스크 근교에서 태어났다. 당시 김일성은 제2극동군 88정찰여단 제1영장(대위) 신분으로 하바로프스크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1984년부터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선전하고 있다. 또 1987년 2월부터는 이 곳에 귀틀집을 마련해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김정일은 자신의 생일을 김일성과 ‘꺾이는 해(정주년)’에 맞추기 위해 출생연도를 1942년으로 조작했다.

김정일이 1980년대 들어 느닷없이 자신의 출생지를 언급한 배경은 80년대 들어 김정일의 어린 시절을 아는 빨치산 출신 원로들이 상당수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또 ‘항일 혁명역사’를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로 이어진 세습체제 우상화에 이용하고자 하는 ‘정치적 상징조작’이라고 볼 수 있다.

황장엽은 자신의 저서에서 “김일성이 어느날 빨치산 출신들을 불러 백두산 밀영자리를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리자 어느 누구도 찾질 못했다. 그러자 김일성이 직접 나서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내 ‘여기가 밀영지였다’고 지적하고 그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그 뒤에 거대한 화강석 바위를 구해다가 거기에 엄청나게 큰 글자로 ‘정일봉’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다 붙이는 큰 공사를 진행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 북한이 김일성, 김정일의 항일운동을 날조한 대표적인 구호나무(左). 구호나무를 유리관 속에 보존하는 모습. 유리관 내부 온도를 섭씨 20도 이상으로 유지하고 화재에 대비해 주변에 스프링 쿨러까지 설치했다.

◆ 빨치산이 붓 들고 다니며 나무에 ‘김정일 찬양’ 새겼다고?

구호나무는 김일성과 그의 부인인 김정숙에 대한 찬양이나 김정일의 출생에 관련된 글귀가 새겨진 나무로 북한은 이 글귀를 1920~1940년대 김일성을 따르던 항일 빨치산 대원들이 밀림의 나무껍질을 벗겨 새겨 놓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호나무’가 평양의 언론에 본격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2월 당시 김정일 당 비서의 45회 생일 때부터였다. 이후 북한 전역에서 발견됐다는 구호나무는 1만 2000여점에 이르며 이 가운데 김정일과 관련된 것만 무려 200여 점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십 년 동안 보고되지 않던 구호나무가 발견사업이 제기되면서부터 갑자기 전국적으로 수만 점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인위적인 조작에 의한 대표적인 우상화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다. 구호나무가 발견되기 시작한 80년대 중후반은 김일성을 신격화시키는 작업이 최고 절정에 올랐던 시기다.

김일성의 항일업적을 찬양하는 글귀를 적기위해 항일 부대원들이 먹물과 붓을 가지고 다니면서 나무껍질을 벗기고 먹으로 써놓았다는 것도 의심스럽지만 동북항일연군 일개 부대장이었던 김일성의 아이가 태어난 것을 두고 “백두광명성이 떴으니 그와 함께 민족의 존엄을 떨치자‘는 글귀를 새겼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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