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성명 1주년> 기대가 낙담으로..6자회담 물건너가나

2005년 9월19일 베이징(北京) 댜오위타이(釣魚臺). 북핵 사태는 물론 궁극적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좌우할 새로운 외교적 이정표가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전 세계의 취재진들 앞에 선 6자회담 의장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우렁찬 목소리’ 로 공동성명(Joint Statement)을 읽어나갔다.

남북한을 비롯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북핵 6자회담 참가국들이 치열한 줄다리기 끝에 만들어낸 성과물이다.

6개 항에 이르는 공동성명은 균형과 집약을 통한 높은 수준의 합의에 초점이 맞춰졌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지붕을 ‘북핵 포기’와 ‘상응조치’가 기둥이 돼 떠받치고 있으며 `관계정상화’ 추진이 두 개의 기둥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그 내용을 실현할 경우 북핵 문제의 해결은 물론 북일, 북미 관계 정상화까지 풀어갈 수 있도록 하는 설계도의 성격도 강했다. 냉전의 마지막 외로운 섬인 한반도가 냉전의 대결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특히 한반도 영구 평화체제 문제를 관련국 포럼을 통해 협상할 수 있도록 명시함에 따라 단순히 핵문제 해결에 그치지 않고 한반도 평화정착은 물론 동북아 안보협력의 밑그림이 될 것으로 평가됐다.

거시적으로 보면 한국전쟁을 일시 봉합한 1953년 정전협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나온 9.19 공동성명은 1차 핵위기 끝에 나온 1994년 북미 기본합의(제네바합의)를 사실상 퇴장시키고 한반도 정세를 좌우할 새로운 틀로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그날의 감동스런 장면이 어느덧 기억의 한 모서리로 퇴장하려 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맞춰 지난 7월 5일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일 양국은 북한을 압박하는 다양한 제재조치를 확대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역동성도 빛이 바래가고 있고 중재자 중국의 노력도 한계에 봉착한 듯하다.

어쩌면 공동성명의 순탄치 않은 운명은 애초부터 잉태돼있었는지 모른다. 공동성명이 발표된 자리에서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종결발언을 통해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와 조속한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 이행을 촉구하면서 인권문제와 생화학무기, 테러리즘, 그리고 불법행위 등을 논의할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공동성명에서 모호하게 처리됐던 북미 양자현안에 대한 미국의 원론적 입장이 재확인되는 순간이다. 워싱턴 내 매파의 주문을 힐 차관보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해석했다.

북한은 다음날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경수로를 제공해야 NPT에 복귀할 수 있다’는 대응을 보였다. 북미간 신경전이 고조되려는 즈음에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암초가 등장했다. 그것도 9.19 공동성명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미국은 6자회담과는 전혀 별개의 채널을 통해 북한의 달러위조와 밀수 등 불법행동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카오의 방코 델타 아시아(BDA)를 북한의 불법자금 세탁창구로 지목함으로써 북한 계좌에 있는 2천400만 달러는 공동성명이 채택된 직후 동결됐다. 북한은 분노했다.

9.19 공동성명 6항의 규정대로 11월 8일 베이징에서 다시 만난 각국 대표들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의 `화난 발언’을 들어야 했다. ‘BDA 조치를 풀라’는 김 부상의 발언에 힐 차관보는 `불법활동에 대한 정당한 법집행’이라고 응수했다.

그리고 사흘 후 나온 이른바 제5차 1단계 회담을 정리하는 `의장성명’은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 회담을 열자’고 했으나 단순한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는 아직까지 오지 않고 있다.

북미 양측의 대결 구도를 완화하려는 시도는 5차 1단계 회담이 끝난 직후부터 있었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12월 제주도에서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모이는 비공식 회담을 제의했다.

하지만 북한은 완강했다. 끝내 `제주도 나들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해를 넘겨 올 1월 18일 북한과 미국, 중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들은 베이징에서 회동했으나 ‘선(先) 금융제재 해제’를 요구하는 북한과 이를 거부한 미국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두 달쯤 뒤인 3월 7일 북미 양국은 이른바 금융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실무적 접촉’을 가졌다. 북한은 위폐문제 해결을 위한 정보교류와 합동 협의기구 설치를 제안했지만 미국은 ‘불법행위는 협상대상이 아니다’며 북한을 몰아세웠다.

4월 중순 도쿄(東京)에서 열린 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를 계기로 김계관 부상은 힐 차관보와 회동하려 했으나 미국은 북한을 외면했다.

악수조차 하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은 6자회담의 앞날을 예고했다. 6월1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측 수석대표를 초청해 대미 직접대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 마저도 실현되지 못했다.

북한도 칼을 빼들었다. 7월5일, 미국시간으로 독립기념일에 해당하는 그 시각,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과 일본은 준비된 대북 압박작전에 돌입했다. 7월 15일에는 유엔에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는 대북결의안이 채택됐다.

7월 말 말레이시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다자회동을 추진했다. 하지만 북한의 백남순 외상은 “제재의 고깔을 쓰고는 어떠한 대화에도 나가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지난 14일 한미 양국정상회담에서 도출된 ‘포괄적 접근방안’은 어쩌면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연명하고 있는 9.19 공동성명의 이행 가능성을 시험하는 마지막 기회인지 모른다.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유도하려는 마지막 노력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6자회담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전 세계의 이목이 다시 한번 ‘포괄적으로’ 한반도에 쏠리고 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