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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아산 측이 지난해 말 금강산 온정리 휴게소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북측에 40만 달러를 주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뉴스를 보고 기자는 ‘그저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느껴진다. 이런 생각은 다른 탈북자들도 비슷할 것이다.
북한이 피해보상금을 사망자와 부상자들의 장례비와 치료비, 위로금으로 쓴다고 하지만, 실제 피해자 가족에게 얼마나 돌아갈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북한에서 교통사고 사망자에 대한 국가적 보상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이번 보상금이 가족에게 전달되지 않고 북한당국이 가져갔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더욱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특수기관 운전사들 음주운전 심해
북한에서는 차량 보험제도가 없어 사고를 낸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개인적으로 보상해줘야 한다. 만약 가해자가 보상해줄 능력이 없으면 감옥에 가야 하고, 갚아줄 능력이 있으면 금전으로 보상한다. 금전적 지불은 TV 나 북한 돈 10만원(남한 돈 3만원)수준이다.
북한에서 사람이 사망하면 남한처럼 엄중하게 다루지 않는다. 더욱이 90년대 중반 식량난을 겪으며, 아사자들을 많이 본 주민들은 죽는 것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편이다.
특히 교통사고를 당해 죽은 사람에 대한 보상은 아주 소홀하다. 기자는 대동강 호안공사에 동원되었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한 사람에 대한 보상절차를 경험한 바 있다.
89년 2월 기자는 다니던 대학에서 제13차 청년학생 축전을 계기로 건설된 평양-남포간 고속도로 호안공사에 동원된 적이 있었다. 호안공사는 대동강변을 따라 뻗어 나간 고속도로의 대동강 쪽 제방에 옹벽을 쌓는 공사였다.
나와 함께 대학동료 3명은 하루 일을 마치고 대동강에서 세수를 하고 숙소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고속도로는 양방향 4차로에 폭이 20m 남짓했다.
저녁 6시경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이따금씩 승용차들이 전조등을 비추며 고속으로 질주했다. 북한주민들은 고속도로라도 차가 없으면 횡단하는 것이 습관화돼 있다.
평양청년학생 축전 준비를 하느라 밤이 되면 평양 쪽에서 축포를 쏘았다. 나와 친구는 밤하늘에 황홀하게 터지는 축포를 바라보며 도로를 횡단하고 있었다.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나더니, 남포 쪽에서 달려오던 승용차가 먼발치에 멈춰섰다.
이윽고 차 안에서 두 명의 사람들이 내리더니 도로를 두리번거렸다. 순간, 뒤에서 따라오던 친구 정혁이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심상치 않아 차가 서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라 다를까, 차 유리가 산산이 깨지고 정혁이는 차로부터 5m 떨어진 뒤에 쓰러져 있었다. 정신 없이 축포를 바라보며 건너다 승용차에 치인 것이다.
승용차는 독일산 ‘벤츠’였고, 차 번호는 ‘평양 15-2985’였다. 앞 번호 15부터 17까지는 사회안전부(경찰)산하 차량번호다. 사고를 낸 자동차는 사회안전부 외화벌이 국장의 승용차였다.
운전사는 40대 중반이었고, 옆 좌석에 탔던 간부가 외화벌이 국장이었다. 우리가 달려가자 국장은 뒷짐을 지고 정혁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정혁이는 중사을 입었는지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빨리 병원으로 가자’고 운전사를 재촉했다. 순간 운전사의 입에서 알코올 냄새가 확 풍겼다. ‘동무, 술 마셨소?’ 나는 운전사를 향해 내뱉었다.
환자를 안아 승용차 안으로 옮기려는데, 뒷좌석에 고급술병이 가득했다. 운전사는 술 박스를 차 트렁크로 옮기고 정혁이를 싣고 평양 ‘조선적십자병원’으로 향했다.
정혁이가 차 사고로 병원에 실려갔다고 하자, 공사 지휘부 교원들이 적십자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 사이 정혁이는 숨졌고, 시체실로 옮겨져 있었다. 대학 공사 총책임자인 부학장과 담임교원은 운전사가 술을 먹고 운전한 데 책임을 지고 학생의 부모에게 보상해줄 것을 요구했다.
TV 와 바꾼 아들, 켤 때마다 나타나
황해도 신천에 살고 있던 정혁의 부모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정혁이 어머니는 청천벽력 아들의 시체를 부여안고 오열을 터뜨렸다. 공부를 잘해 대학에 갔던 아들이 싸늘한 시체로 변해 나타난 것을 보고 아버지는 할말을 잃었다.
대학측은 외화벌이 국장에게 운전수가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외화벌이 국장은 “운전수를 감옥에 넣는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겠는가”라며 보상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럼 얼마나 보상하겠는가’라고 하자, 국장은 정혁이 부모에게 TV와 냉장고를 주겠으니 그걸로 마무리 하자고 했다. 담임교원은 ‘그걸로 안 된다. 동무네가 정 그러면 중앙당에 제기하겠다’고 반발했다.
이튿날 대학 초급당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전부에서 장례식도 해주고 색(컬러)텔레비를 주겠다고 하니 그렇게 하시오”라는 것이다. 사회안전부에서 초급당 비서에게 모종의 암시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 얼렁뚱땅 넘어가면서 음주 운전수를 살리겠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당의 지시라 누구도 감히 대들지 못했다.
장례식은 적십자 병원에서 간단하게 진행됐고, 정혁이는 공사 지휘부 뒷산에 묻혔다. 며칠 후 대학 당위원회에서는 정혁이 부모에게 ‘사회주의 애국 열사증’을 발급해주고, 사회안전부 외화벌이 총국에서 보낸 ‘삼일포’ 컬러 TV와 냉장고를 보냈다.
이렇듯 억울하게 죽어도 ‘열사증’ 하나 떼어주면 그만이다. 아들과 바꾼 TV 를 받고 정혁이 어머니는 하염없이 울었다.
훗날 정혁의 집에 가보니 TV가 없어졌다. 사연을 물으니, TV를 켤 때마다 화면에 아들이 자꾸 나타나 어머니가 팔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교통사고만 보면 묘주도 없이 외지에 쓸쓸하게 묻혀 있을 그가 먼저 생각났다.
금강산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군인도 이와 비슷하게 처리됐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에서 준 40만 달러는 당국이 ‘알아서’ 처리했을 것이고, 사망자 가족에게는 ‘열사증’과 TV, 냉장고 등이 전달됐을 것이다. 이것이 김정일 독재정권과 ‘우리식 사회주의’의 현실이다.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