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아는가?…戰史에 남은 ‘위대한 장진호 전투’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의 유엔군은 인천 월미도에 상륙,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바꿨다.

57년이 지난 2007년 9월 15일.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160여 명의 해외 참전용사와 가족들이 한국땅을 밟았다. 57년 전 전장에 서보지 못한 우리들은 이들의 감회를 감히 상상할 수 없으리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바꾼 유엔군은 일제히 북으로 진격, 9월 29일 38선을 돌파하고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했다. 동부전선을 이끌던 미 제1해병사단은 강계로 도피중인 북한 정부를 향해 11월 영하 30도의 개마고원 장진호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는 집으로 돌아가서 맞을 거라 기대하며 장진호에 들어선 2만5,800명의 미 해병들. 그러나 이들을 맞은 건 13만(12만 8,000명)의 중공군이었다. 중공군은 밤에만 은밀히 행군하며 낭림산맥 속으로 스며들어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했다. 서부전선의 유엔군도 중공군에 밀려 철수를 준비하던 터, 이들은 장진호에 고립되고 만다.

11월 27일, 장진호의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저항에 부딪히며 유담리로 후퇴, 전열을 가다듬고 중공군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29일 중공군의 공세에 맞선 미 해병대는 모든 화력을 동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0배가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 사흘간의 전투는 미 해병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12월 1일 미 해병대는 철수를 결정한다. 그러나 겹겹이 쌓인 중공군의 포위를 뚫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포위망을 뚫기 위해 조직된 2,500명의 특수임무 부대는 중공군이 장악한 마을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때 살아남은 미 해병대는 1000명. 전우의 시체를 안고 나오기도 부족한 숫자였다. 간신히 안전한 곳으로 옮긴 미 해병대는 12월 11일 흥남부두에 도착. 15일 자신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줄 함선에 몸을 실었다.

7,000명이 전사한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 군사(軍史)상 가장 큰 피해를 남겼다. 그러나 결코 패배한 전투로 기억되지 않는다. 미 해병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18일간 막아 주었기에 10만 명의 피난민이 흥남부두를 통해 철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 해병대에게 장진호 전투는 자신들의 피해에 10 배의 피해를 중공군에 입히며, 돌파에 성공한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으로 전사에 기록되고 있다.

‘얼어붙은 장진호’는 이렇게 18일간 살인적인 추위와 중공군에 맞서 싸운 미 제1해병사단의 전투를 그린 소설이다.

죽음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의 인터뷰 기록과 전쟁일지, 일기를 바탕으로 그려졌다. 작가 고산(高山) 고정일은 이 소설을 장진호 전투에서 스러져간 미 해병 병사들과 중공군 병사들에게 바친다고 한다.

얼어붙은 장진호 빙판 위, 중공군과 마주선 미 해병이 묻는다.
“너는 왜 이 얼음지옥에서 전쟁을 하는가?”
“메이 유 파쯔(没有法子: 그것은 내 능력 밖이다). 그것이 인생 아닌가?”
이번에는 중공군 병사가 미 해병에게 묻는다.
“너는 왜 바다 건너 이곳에 와 전쟁을 하는가?”
“역사나 인생에는 선과 악이 없다. 오직 그 강약이 있을 뿐이다. 먼저 인간이 있고, 다음 그들이 헤쳐 나가야 할 시대가 있다.”

▲ 15일 오전 인천상륙작전 5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참전용사들 ⓒ연합

작가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므로, 선과 악을 넘어 그들의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대립의 시대, 이들은 시대의 정의에 충실했다. 극동의 작은 반도에서 미군들은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시대에 대한 사명감으로 치열한 전투를 치른 것이다.

이제 시대가 변하고 그때의 기억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사라짐과 동시에 왜곡도 되고 있다. 미군은 점령군이었으며 북의 통일전쟁을 막은 제국주의 군대이다. 아직까지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며 남북 평화체제를 막는 걸림돌일 뿐이다. 북한 당국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내는 친북좌파 세력들에 의해서 말이다.

작가는 장진호의 기억은 장진호 바깥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집단적 기억, 역사의 언설(言說)을 구성하는 것은 그 지옥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치열했던 전투를 알지 못하는 세대들에 의해 미군의 공훈이 사라져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자유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돌아보며,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나라를 위해 피 흘린 미 해병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이유미/대학생 웹진 바이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