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번도 계급도 없는 학도병들 목숨걸고 싸웠다”

백발이 무성한 일흔 일곱 살 할아버지는 60년 전의 기억을 거슬러 6.25참전 당시 경험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이름은 경서호. 1950년 6.25가 발발하던 당시 열 입곱 살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냥 책상에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현 대한민국학도의용군회 회장 경서호 씨. ⓒ데일리NK


경 씨는 젊은 세대가 책에서만 봐왔던 학도의용군 출신이다.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누르지 못하고 교복을 입은 채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부모님은 만류했지만 어린 경 씨의 결심은 단호했다. 


정식 징병 대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경 씨는 소속도 없고 군복도 없고 계급도 없었다. 그는 교복, 교모, 애국심을 가지고 전사한 국군의 총을 받아 인민군을 향해 맞섰다.


남침당시의 인민군은 말이 끄는 야포(野砲)를 가지고 다녔으며 삼륜차 오토바이를 타고 거침없이 내려왔다. 인민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국군들의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그는 강원도 춘천이 고향이지만 인민군에 밀려 순식간에 포항까지 후퇴했다. 학생 신분으로 전장에 있던 그는 포항에 와서야 보명 7169부대 8사단 21연대 2대대 수색정찰병으로 정식 배치됐다. 그러나 여전히 군번이 없는 학도의용군 자격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수색 임무는 고됐다. 수색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들보다 죽어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위 ‘실탄받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는 적의 동향을 판단하고 보고하기위해 죽음을 무릎쓰고 전방을 수색했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지만 수색대는 대공표지를 표시하는 작업까지 수행해야 했다. 키보다 더 큰 M1 소총은 지고 다니는 것만 해도 힘이 부쳤다. 하지만 아군이 공군의 지원 을 받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였다.


도중에 검은 물체가 지나가면 암구호로 아군인지 적군인지 파악했다. 매일 바뀌는 암구호를 기억하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숙지했다.


경 씨는 고탄 북방지역 내평리를 수색했을 때 인민군을 만났다. 그들과의 거리는 10m도 안됐다. 총탄이 날아 들었다. 그는 재빠르게 몸을 숨겼지만 함께 나갔던 전우 몇 명은 인민군의 총탄에 의해 전사하고 말았다.  


고향에서 그와 함께 수색정찰병에 배치된 춘천사범학교, 춘천농업학교, 춘천중학교 80여명의 학도의용군 가운데 작업 중에 60여명이 전사했다. 


경 씨는 횡성전투에도 참가했었다. 그 때 처음 중공군을 만났다.


1.4후퇴 때의 일이였다. 강원도 횡성 공군면. 달빛도 없는 조용한 밤에 갑자기 피리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중공군 이었다.


산울림에 중공군이 앞에서 오는지 뒤에서 오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 경 씨는 온 몸에 공포가 휩싸였다. 말할 수도 없는 위압감에 정신이 혼미했다.


경 씨가 소속된 8사단은 압도적인 수의 중공군에게 순식간에 포위당했다. 피리소리가 그치자 중공군은 따발총과 장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산 전체를 울리던 피리소리는 순식간에 총탄소리로 바뀌었다.


아비규환(아귀비환)의 현장에서 경 씨는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8사단은 사단기까지 빼앗겨 전멸이나 다름없었다. 말로만 듣던 중공군의 인해전술 이였다.


그는 전투 중에 자신이 파논 방어호에서 목숨을 건진 적도 있다.


경 씨는 6.25 사태 이전 춘천중학교3,4학년(16,17살) 때 군사교육의 일환으로 전교생(1000여명)과 학교 근처의 3.8선 부근에서 방어호를 판적이 있다.


1.4후퇴 이후 다시 북진을 할 적에 우연찮게도 그는 그가 파논 방어호에서 전투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재학시절 자신이 판 방어호에서 전투를 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지독한 우연이었다고 말했다. 


경 씨는 당시 “근로 동원할 때는 왜 하기도 싫은 이런 노동을 시키냐”며 투덜거린 적이 있었지만 방어호를 사용하고 보니깐 ‘아, 방어호가 이런거로 구나! 이것이 내 생명을 지켜주는구나!’라고 감탄했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하곤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1952년.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복귀 령으로 학도의용군은 복귀한다. 그러나 이산가족이 되고, 전선 속에서 위치파악이 불분명했던 대부분의 학도의용군은 현역에 입대했다. 당시 6.25에 참전한 16~18세의 어린 학도의용군은 약 2만명이 였으며 1만 3천여명이 꽃다운 나이에 전장에서 전사했다.


경 씨는 “그 당시 전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다. 우리나라의 기강, 국가관이 너무 헤이해졌다. 요새 젊은이들은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탄식했다.


지금으로부터 57년 전, 1953년 전쟁은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중단됐다. 국가는 국가를 위해 자진해서 참전한 학도의용군에게 ‘군번을 부여받지 않고 전쟁에 참여해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훈·포장 수여와 국가유공자 대우를 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 아직도 대한민국 걱정에 여념이 없다.









▲구국전선에 지원하는 학도의용군들 가족·친지들의 환송을 받으며 열차에 오르고 있다. ⓒ학도의용군실전기








▲교모를 쓰고 무장을 갖춘 학생들(구국충정에 불타고 있다)ⓒ학도의용군실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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