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중국 북한, 왜 집단아사했나?

▲ 거리에서 굶어 죽은 북한 소년

수 천년 전부터 농사를 짓고 살아온 우리 조상들은 흉작이나 화재에 의해 야기된 기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농업 기술과 교통, 통신 수단의 발달로 필요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지역에서 흉작이 발생할 경우에도 다른 지역에서 식량을 가져올 수 있는 통신, 교통수단이 충분히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도 기근은 없어지지 않았다. 최근 1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굶어죽은 사람들의 수는 적어도 5, 6천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왜 이렇게 됐을까?

20세기의 기근은 그 이전의 기근과 양상이 다르다. 1900년대 이전에는 주로 흉작이나 화재 때문에 기근이 생겼지만 최근 100여년 동안의 기근은 ‘정치’로 인해 발생했다.

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무정부 사태는 사람들이 굶어죽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전쟁 등 정치적 혼란상태에서는 정상적인 지역간 교류가 불가능해져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식량도 구입할 수 없게 된다. 정치적 혼란으로 초래된 기근의 대표적인 사례는 1920년대 중국에서 발생한 몇 차례의 기근이다.

20세기 대기근은 정치적 살인

이보다 더 참혹한 기근이 있다. 그것은 정치적 혼란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전략’ 때문에 발생했다. 집권층이 식량결핍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인 수단을 갖고 있었지만, 정치적 이유 때문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의식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사실상 이는 수많은 국민들을 굶겨 죽이는 행위를 의미했다.

20세기 기근의 큰 원인 중 하나가 공산주의 이론이 주장한 ‘농업 집단화’다. 20세기 동안 인류가 경험한 10차례의 대규모 기근 중 3차례는 바로 집단농업이 초래했다. 이 3차례의 기근이 바로 1930년대 소련의 기근, 1900년 이후 가장 많은 아사자를 낸 1960년대 중국의 기근, 또 1990년대 북한의 기근이다.

소련 기근: 중화학 공업화 위해 수백만명 아사

많은 사람들이 스탈린이 ‘미치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스탈린의 정책과 그 결과를 보면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 스탈린이 ‘미치광이’였다면 정치적 혼란기에 정권을 잡고 거의 30년 동안 체제를 유지하면서 낙후한 나라였던 러시아를 초강대국으로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스탈린이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유난히 없었고 자신의 정지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규모로 사람을 희생시켰다는 데 있다. 1931-33년 소련기근의 참극을 보면 이러한 스탈린의 특성이 아주 뚜렷이 나타난다.

강군(强軍)을 역설한 스탈린은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고속 공업화를 중요한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낙후한 국가였던 소련은 공업화를 위해 해외에서 기술과 설비를 수입할 돈이 없었다. 시베리아 유전지대를 발견하기 이전의 소련은 세계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도 거의 없었다. 스탈린은 긴급히 수출할 만한 상품으로 식량, 특히 곡물을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소련은 1917년 혁명 이후 땅을 받은 농민은 재배한 곡물을 국가에 적당한 가격에 팔았다. 그러나 스탈린의 입장에서 국가의 돈을 농민들로부터 곡물을 구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자원 낭비였다. 수출할 식량은 무료로 받아야 됐다.

이러한 조건에서 스탈린은 농민들로부터 알곡을 거의 무료로 얻을 수 있는 계획을 준비했다. 스탈린은 농민들을 정부의 직접 통제 아래에 있는 집단농장(콜호스)에 몰아넣었는데, 집단농장은 말로만 협동소유였지 사실상 완벽한 국가의 소유다. 이 농장에서 생산되는 식량을 국가가 거의 무료로 빼내고 나머지가 농민들이 생존할 수 있는 정도만 남아 있어도 운이 좋았다.

물론 농업 집단화 정책은 이론적인 기반도 없지 않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비롯한 공산주의 사상가들은 집단농장이 나중에 등장할 것으로 예언했고 집단농이 개인농보다 더 효과적인 생산단위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소련에 있었던 집단화 농장은 이러한 이론보다 스탈린의 현실적인 고려, 그리고 공업화의 긴급한 요구와 더 많은 관련이 있었다.

1930년 대규모 농업집단화가 시작됐을 때 농민들은 새로운 제도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와 무서운 경찰에 노골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 농민들은 어차피 빼앗길 재산을 파괴했고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정부는 농가에 있는 모든 식량, 특히 곡물을 몰수했는데, 국유화된 알곡을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이 부족할 정도였다.

새로 생긴 콜호스에서는 국가에 바쳐야 할 할당량은 많은 반면, 생산성이 높지 않아 농민들에게 배급할 식량은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1931-33년 전국의 알곡생산 중심지였던 소련 남부는 기근의 땅이 되어 버렸다. 유목민 지역인 카자흐 공화국도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스탈린은 대규모 기근에도 불구하고 집단화를 계속 했고, 국가에 바쳐야 하는 할당량도 줄이지 않았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어나던 시기에 소련은 곡물을 많이 수출했고, 이렇게 번 돈으로 중화학 공업 기술과 시설을 수입했다.

1931-33년 기근으로 아사한 사람들의 수는, 정확한 통계를 파악할 수 없지만, 소련 남부인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에서 아사자는 2백~5백여만 명으로 추계되었다. 카자흐 공화국에서는 1백~2백만 명에 달했다. 전체 소련 인구의 2-4%가 굶어 죽었던 것이다.

중국: 마오쩌둥 야심, ‘유토피아’ 착각으로 3천만명 아사

1960년대 초 중국에서 발생한 기근은 20세기의 기근 중에서도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 기근 발생 원인은 1930년대의 소련 기근과 비슷했다. 중국 기근도 집단농업 정책을 농민들에게 강제로 부과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스탈린은 국제관계의 긴장상태 때문에 고속 중화학공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1950년대 말 중국의 정치는 긴장 요인이 없었다.

당시 마오쩌둥의 이같은 생각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인 고려보다 이론적인 고려를 더 중시한 것 같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집단농업의 우월성을 믿고 집단화를 통해 중국에서 완전한 공산주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중국 공산당은 기계가 심각하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농민들을 동원시키면 지상낙원인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보다 빠르게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58-59년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대약진운동을 벌였다. 대약진운동의 목적은 나라를 급속도로 현대화하고, 10~15년만에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국가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중국 민족주의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의 개인 야심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중국 정부는 소련 콜호스보다 국유화 수준이 더 높은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조직했다. 이 ‘인민공사’에서 농민들을 공동취사 하도록 하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원칙을 실시하도록 했다. 닭이나 농기구까지 다 집단화, 즉 국유화 되었다. 또 농민들은 농사뿐 아니라 공업 분야의 노동에도 동원되었다.

중국의 인민공사는 스탈린의 콜호스보다 더 극단적인 집단화 정책이었다. 따라서 그 실패도 스탈린의 실패보다 더 극심했다. 1960년 대규모 기근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 1959~62년에 농업 집단화로 굶어죽은 사람은 2천만~3천만 명으로 추계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정부처럼 마오쩌둥 정권은 기근이 있다는 사실마저 인정하지 않았고 외국 원조도 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나라의 위업'(정확하게 공산당의 정당성)이 수천만 명의 농민들의 생명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1960년대 초 중국 정권은 대약진운동을 조용히 철회했다. 몰수했던 농기구나 일상용품도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집단농장을 폐지할 때까지 중국 농민들은 어렵게 살아야 했다.

북한: 극소수 특권층 위해 수백만명 아사

1990년대 말 북한의 대기근은 중국, 소련처럼 집단농업의 낮은 효율성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 공산권 국가의 지도자들도 집단농업에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도, 베트남도 농업개혁을 통해 전통적인 개인농 중심으로 제도를 바꾸자, 만성적인 식량 결핍으로 고생하던 국민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공급할 수 있었다.

북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나라의 경제가 계속 나빠진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이 때문에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개인농을 도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보였다. 그러나 북한은 심한 정치적 제한이 있었다.

중국이나 베트남에게는 ‘또 하나의 중국’이나 ‘또 하나의 베트남’이 없다. 물론 대만이 있지만 2천만 명의 대만이 13억 명의 중국에 큰 영향을 주기 어렵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남한도 있고 북한도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북한은 주민에 대한 극단적인 통제와 감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통제와 감시가 없을 경우, 인민들이 자신의 생활형편이 남한보다 훨씬 나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정부를 뒤집어 엎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북한 지배층은 중국식 농업개혁은 감시와 통제를 약화시키는 정책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농민들이 자기 땅에서 자신을 위해 농사를 짓는다면 국가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 정부는 개인농이 식량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제도임을 잘 알고 있지만, 이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지배층의 정치적 자살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 북한이 농업개혁을 했더라면 체제가 생존했을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북한 특권층들의 이러한 걱정이 근거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북한 지배층은 중국식 개혁을 하지 않고 정권의 안정을 위해 집단농업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미 1980년대부터 심해진 식량위기는 199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 기근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수백만 명의 주민이 굶어죽었지만 김정일 정권은 보장되었다.

20세기의 ‘정치로 인한 기근’의 역사는 참극의 역사다. 가장 유감스러운 사실은 ‘대량 학살’의 형식인 기근을 의식적으로 초래한 정부와 독재자들이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4백~6백만 명의 농민들을 죽임으로써 정권을 강화하고 초강대국의 최고 독재자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3천만 명의 무고한 농민들을 아사시키고 거대한 나라에 절대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 1990년대 초 김일성 사망 후 누구나 오랫동안 집권하지 못할 인물로 봤던 김정일은 수많은 양민들의 삶을 희생시키고 특권을 계속 누리고 있다.

앞으로 김정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스탈린도 마오쩌둥도 별문제 없이 늙을 때까지 잘 살았고 나라를 통치했다. 이 사실만 보면 ‘범죄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믿기 어렵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 역사학 박사

<필자 약력>
-구소련 레닌그라드 출생(1963)
-레닌그라드 국립대 입학
-김일성종합대 유학(조선어문학과 1986년 졸업)
-레닌그라드대 박사(한국사)
-호주국립대학교 한국사 교수(1996)
-저서 : <북한현대정치사>(1995) <스탈린에서 김일성으로>(From Stalin to Kim Il Sung 2002) <북한의 위기>(Crisis in North Korea 2004)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