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사회 성생활과 북한

▲ 모스크바 젊은이들의 졸업식 풍경 <사진:연합>

소련이 개혁정책을 시작한 1980년대 중반, 소련과 미국 사람들이 위성통신으로 벌인 TV 토크쇼는 인기가 대단했다.

이 토크쇼에서 양측이 일상생활의 여러 문제를 비교적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소련에서 시청률이 굉장히 높았다.
1986년 이 토크쇼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미국여성이 “소련여성들의 성(sex)생활 문제는 어떠냐?”고 물었다. 이에 소련 아가씨는 곧바로 “우리 소련에는 성이 없다”고 말했다. 당시 소련 아가씨의 이 답변은 너무나 유명했다.

이 ‘이상한’ 답변은 당시 소련당국의 성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소련에서는 성에 대한 노골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공산당을 비롯한 기관은 혼외, 혼전 성관계를 한 사람들을 ‘비도덕 분자’로 낙인찍고 이러한 행위를 퇴치하려고 했다.

초기 공산주의와 ‘물 한잔론’

그러나 공산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세기 중엽 초기 공산주의 운동만큼 페미니즘을 적극 지지한 정치사상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여성은 투표권도 없고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관리할 수도 없었던 그 시대에 사회주의 운동은 정치, 경제뿐 아니라 사회 각 부문에서 남녀가 완전히 평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여성들의 “부엌과 가사의 노예상태에서 해방하자”는 말까지 했다. 가부장적인 가치관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던 시대에 이러한 입장을 내세운 사회운동은 거의 전무했다.

성생활에서도 자유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세계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사가 된 꼴론따이 (Kollontai) 여사는 ‘물 한잔론’을 내놓았다. “인간이라면 성행위는 물을 마시는 것처럼 자유스러운 일이니까, 성본능을 만족시키는 것은 갈증을 풀기 위해 물 한잔 마시는 것처럼 문제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레닌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은 ‘물 한잔론’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여성의 자유를 제한했던 법령은 많이 개혁했다. 1917년 공산혁명 직후에 채택한 ‘결혼법’은 혼인등록을 의무화하지 않았다. 사생아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이혼도 쉽게 할 수 있도록 했다.

1920년대 말의 소련 가족법은 1960년 이후 서방 선진국에서 채택한 법과 비슷한 점이 놀라운 정도로 많았다. 낙태도 허락되었고 피임 방법도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1920년대 젊은 공산당 간부나 지식인들의 생활을 다룬 소설을 보면, 이 계층에서는 성관계를 매우 자유롭게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젊은 남녀들은 공식적인 결혼에 신경 쓰지 않았고 쉽게 성관계를 맺고 또 별문제 없이 헤어졌다.

성생활 분야에서는 1920년대 소련의 젊은 지식인들은 1990년대 독일이나 프랑스 대학생들과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다. 1930년대까지 소련 공산당은 이러한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 어느 정도 촉진했다.

스탈린 시대, 성문화 압박

그러나 소련의 보통 서민들은 전통적인 성도덕을 계속 지켰다. 성에 대한 이중 잣대를 적용한 전근대적 도덕은 18세기 조선이나 19세기 영국처럼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했다. 대체로 가족 중심의 성생활을 강조했고 여자에게는 순결을 요구했다. 초기 공산정권은 이러한 성도덕을 ‘봉건시대 유산’으로 보았기 때문에 뜯어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성문화가 달라진다. 당시 세계 대전으로 인해 소련 전체가 민족주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공산정권은 민족주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 때문에 성문화 분야에서도 정책이 180도 바뀌었다. 이후 공산정권은 전통적인 가족 가치관을 나라의 힘에 기여할 수 있는 미풍양속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스탈린 시대 소련 당국자가 장려했던 성문화는 현재 미국의 기독교 우익단체들이 지지하는 성문화와 아주 비슷하다.

1940년대 들어 이혼에 따른 법률적인 조건이 까다로워졌다. 낙태는 유죄가 되었다. 혼외정사가 적발되면 당세포가 관련 남녀를 처벌하는 것이 일상사가 되었다. 이혼한 간부는 출세하기 힘들었다. 1944년부터 혼인등록이 다시 의무화되었고, 사생아들도 일정수준 차별받았다. 1940년대 말부터는 성생활을 다룬 책 출판이 금지됐고 성문제에 대한 담론은 실제로 불가능해졌다.

스탈린주의 성문화는 또 다른 면에서 전통적 가치관과도 차이가 있었다. 전근대적 성문화는 매춘을 비판했지만 사회적으로 용납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에는 매춘을 거의 완전히 근절했다.

스탈린 시대 성문화는 1940년대에 소련에서 북한으로 수입되었다. 소련보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더 강했던 북한은 이러한 가치관이 자라나기에 정말 퐁요로운 터전이었다. 북한은 소련처럼 매춘을 근절했고 혼외, 혼전 성행위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지만 많이 제한했다. 물론 김일성의 북한은 소련보다 훨씬 감시가 엄격했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을 실시하는 것도 더 쉬웠다.

80년대 구소련 성문화, 이미 유럽과 유사

그런데, 1940년대부터 소련당국은 성문화를 제한하려고 했지만 실제생활에서는 공산당이 원하는대로 흐르지 않았다. 1940년대 이후 빠르게 변화한 소련사회는 공산당 정권이 요구한 보수적인 성도덕에 대한 지지도 줄어들었다.

1945년 이후 도시화, 핵가족화, 여성들의 대량 취업, 교육의 대중화, 개인주의 강화 등의 추세가 소련사회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그 결과 성문화는 서양 선진국에 볼 수 있는 경향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련은 다민족 국가였기 때문에 민족이나 지역에 따라 변화의 속도도 많이 달랐다. 서유럽과 가까운 발틱해 지역의 소수민족이 변화가 제일 빨랐고, 회교의 영향이 큰 중앙아시아가 가장 느렸다.

1970년대에 들어와 소련의 도시에서는 성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은 거의 무너졌다. 1960년대에 태어난 젊은 세대는 혼전 성생활을 문제삼지 않았고, 혼전동거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소련당국도 ‘올바른’ 가치관을 선전하긴 했지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혼외정사도 눈감아주었다. 영화나 소설에서도 성행위에 대한 묘사가 차츰 등장했다. 공식적으로는 금지였지만, 실제는 ‘허용’이었다. 이같은 추세가 이어지면서 앞서 이야기한 미국 시민과의 TV 토크쇼에서 소련 아가씨가 “소련에는 성이 없다”는 ‘공식적인’ 답변을 하게 된 것이다.

사회발전과 성개방은 동일 행로

물론 스탈린 이후의 소련은 북한보다 자유가 많았다. 소련에는 북한처럼 ‘통행증’이라는 것도 없었고, 숙박검열과 같은 것은 악몽을 꿀 때나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사건 같은 것이다.

1960년대 소련에서는 대중주택 건설 붐이 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몰래 애인과 만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아파트가 없는 사람들은 친구의 아파트를 이용했다.

대학생들은 기숙사에서 같이 방을 쓰는 룸 메이트에게 몇 시간 동안 돌아오지 말라고 부탁하면 되었다. 기숙사는 보통 한 방에 2-3명이어서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호텔 경우에 남녀가 같이 투숙하려면 반드시 배우자임을 확인하는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그래서 1980년대 말부터 소련의 성문화는 유럽인들의 성문화와 거리가 멀지 않았다. 1960년 이후 서양사회는 성에 대한 담론을 많이 했고, 1990년 이전 소련사회는 이러한 담론을 피했지만 실제 결과는 비슷했다.

좋아하든 말든 현대의 개방 성문화는 산업사회의 발전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소련의 성문화도 이러한 변화에 따라 바뀐 것이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 역사학 박사

<필자 약력>
-구소련 레닌그라드 출생(1963)
-레닌그라드 국립대 입학
-김일성종합대 유학(조선어문학과 1986년 졸업)
-레닌그라드대 박사(한국사)
-호주국립대학교 한국사 교수(1996)
-저서 : <북한현대정치사>(1995) <스탈린에서 김일성으로>(From Stalin to Kim Il Sung 2002) <북한의 위기>(Crisis in North Korea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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