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권 장막을 걷어 젖혀라”

1973년 11월 대한무역진흥공사(Korea Trade Promotion Corporation) 에 입사하였다.

KOTRA(이하 ‘코트라’로 표기)는 1961년 5.16 군사혁명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소장의 특명에 의해 설립된 무역입국(貿易立國)을 사훈으로 하는 수출전선의 최첨병 조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는 수시로 코트라를 직접 방문하여 업무지시를 할 정도로 애정을 표시했던 기관이다.

코트라는 한국은행과 함께 유일하게 조사연구 전담부서가 별도로 있어 각종 해외경제정보를 수집, 분석하였다. 또 박람회 참가, 수출거래 알선을 통해 해외 바이어를 관리하는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능을 수행하였다. 해외를 바라 볼 수 있는 창구이자 동시에 구체적으로 사업도 수행할 수 있는 일종의 ‘해외경제공작기구’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입사후 나는 주로 해외 바이어를 국내업계와 연결시켜주는 사업부에 말단으로 배치되었다. 첫 출근하던 날 당시 임춘택 담당과장은 나에게 “ 홍형, 판문점에서 군복무 했다고? 보안업무를 잘 알겠군, 우리부의 보안책임자로 임명하오” 라면서 열쇠뭉치를 나에게 던져 주었다.

문서가 가득한 두 개의 육중한 캐비넷을 가리키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보안감사에 각별히 주의하시요”라고 덧붙였다. 캐비넷을 열자 붉은 글씨로 대외비, 3급비밀, 2급비밀의 도장이 찍힌 수백개의 문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북방개척은 이미 1970년에 시동

코트라는 이미 60년대 중반부터 물자교역을 이용하여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북한의 형제국가들인 동구 공산권과 다양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

동서간의 냉전은 치열했고 남북은 창과 방패를 들고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전방위적으로 대결하였던 시기이다. 월남전도 막바지를 치닿고 있던 70년도 초, 우리는 배고픈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우리 제품을 사준다면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았던 시절에 나는 적과의 ‘노골적인 동침’을 위해 북방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담당과장에게 “공산권 경제교류를 맡겨 주시면 보안관리도 겸하여 잘 하겠다”고 하자 나를 사내 최초로 공산권 경제교류 담당자로 발령을 냈다. 당시 공식적으로 소련, 중국, 동구를 포함하여 전 공산권을 ‘미수교 시회주의권’ 또는 북한을 제외한 ‘비적성 공산권’으로 불렀다.

나는 앞으로 이들 국가들과 직접 접촉을 하거나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방해 공작이 예상되었고 우리의 상대가 외교적으로 곤경에 처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이들 국가를 ‘특수지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동서간 외교전이 치열했던 시절, 우리는 우방국의 북한 접근을 좌시하지 않았지만 북한 역시 자신의 동맹국들의 앞뜰을 우리가 들락거리는 것을 눈에 쌍심지를 켜고 경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80년대 들어 정부의 대 공산권 외교정책이 공개적으로 추진되면서 이들 지역을 싸잡아 ‘북방권’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특정지역 국가들을 하나로 묶어 공산권, 특수지역, 북방권으로 부른 것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편의에 따른 가당치 않은 작명이었다.

6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확신하고 국력을 수출전략으로 집중하였다. 이미 중국산 가발용 인모(人毛), 누에고치, 견사 등 당시 우리의 주력 수출상품인 가발, 실크제품의 원자재들이 홍콩을 통해 수입됨으로써 국내 수출업체에게 중국은 우리의 수출용 원자재 공급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1970년 정부는 무역거래법 제2조인 적성국가와의 무역거래 금지조항을 삭제하여 북한을 제외한 전 공산권 국가와의 무역거래를 허용하였다.

말하자면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으로 굳게 문을 걸어잠근 소련, 중국, 동구권과 상대방의 의사는 전혀 무시한 채 이들 국가와 경제관계를 공개화하고 정상화 하겠다는 일방적인 방침을 세운 것이다. 1971년 1월에는 그 후속조치로 코트라를 공산권 경제교류 접촉창구로 지정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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