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뱅이 잡으러 갔다가 골병든 이야기②

전편으로 바로가기 대성무역 상사가 골뱅이를 실어 나를 북한 선박회사와 계약할 수 있도록 ‘위임장’을 보냈다.

가능하면 내가 가야하지만, 사인 하나 하는 것 때문에 평양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에서 평양까지 7일이나 소요되니 대서무역이 필자 대신 계약라고 통보했다.

계약을 체결하면 운반비는 조선의 모든 선박을 총괄하는 일본 근양해운(북한 선박회사들의 일본 총 대리점) 선박대리점을 통해 직접 달러로 지불토록 하겠다고 위임장에 기록했다.

회신 텔렉스가 왔다. 북한 선박회사에서 계약을 믿으려고 하지 않으니 위임장도 필요 없고, 사장 선생이 평양으로 와서 직접 대면하고 계약을 하라는 것이었다. 냉동보관 창고에서 계속 경비만 발생하니 시급히 운반선 해결을 안 하면 인민에게 먹이고 말겠다는 협박조의 통보가 왔다.

며칠 동안 고민을 했다. 계속 텔렉스가 온다. 며칠까지 평양도착 안 하면 계약 파기하고 말겠다고 한다. 도대체 이런 경우도 있나? 평양에서 평양에 있는 선박회사와 계약하면 간단히 끝날 것을 미국에서 평양까지 가서 계약을 해야 된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선박회사 책임 지도원에게 텔렉스를 보냈다. 무소식이다. 포기를 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속이 상해도 교육을 시켜가면서 눈과 귀를 뜨게 해줘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남보다 먼저 대북사업을 시작한 원죄(?)로 여기고 개척자의 고충과 시련으로 이해하기로 햇다. 그리고 “이 일은 바로 내가 해야 한다! 그래 꾹 참고 해보자!”라고 생각했다. 미국 출발-서울, 홍콩, 북경 경유 6일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대성무역상사 사장과 선박회사 담당자를 고려호텔 회의실로 불렀다. 안내원에게 부탁하여 해외동포원호위원회의 참사(김영수)도 동석을 시켰다.

“미국이란 나라가 당신네 옆동네인 줄 아는가?”

조선의 실정을 들어도 우리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세상에 이런 식의 무역거래도 있느냐? 평양까지 오려면 순조롭게 와야 6일이 걸린다. 평양 한번 왔다 가면 경비가 1만 달러 이상 날라 간다. 시간이 즉 돈이다. 왜? 이런 식으로 해외동포를 괴롭히느냐? 동무들은 미국이란 나라가 바로 옆집인줄 아느냐?”고 했다.

이어 “미국은 땅만 파면 달러가 나오는 줄 아느냐? 내가 평양까지 안 와도 충분히 해결 할 수 있는 일인데,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무역 거래를 해야 한다면 나는 할 수가 없으니 이번에 내가 평양 온 김에 운반선회사 하고도 아예 계약을 하자! 그래야 마음 놓고 통신으로 서로 의견교환을 하면서 사업을 할 것 아니냐?”고 꾸중 겸 따졌다.

나만 속상했지 별 방법이 없다. 책상을 뒤집고 싶은 울분이 치솟았지만 참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고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이것은 내가 택한 길이다. 계약서에 서명하는데 화가 치밀어 입이 마르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들도 나의 손 떨림을 목격했다.

안내원 김현철이가 내 손을 잡으며 “사장 선생 잘 참았시요. 잘 될 겁네다. 우리 동무들이 아직 아무 것도 몰라서 그러니 리해 하시라요.” 다소 위로가 된다.

6일 걸려 간 평양인데도 다른 사업에 대한 상담도 하기도 싫고, 사람들도 보기 싫고, 더 이상 한 시간이라도 빨리 평양을 떠나고 싶어 비행기 있는 날까지 기다리기가 싫어 2박3일로 체류를 마치고 기차 편으로 신의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단동 경유-북경까지 22시간 국제 열차 좁은 침대칸에 몸을 실었다.

“이 험난한 길을 가야 하나?”
“그래 이렇게 해서라도 바깥세상을 조금이라도 알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어 동족이 눈과 귀가 열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내 모습을 통해 남쪽 동포들의 사는 모습을 짐작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내 민족을 위하고 내 나라를 위하는 길이 아니겠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밤새 몸부림으로 화를 달래야만 했다.

귀국길에 서울에서 며칠 쉬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북한을 당분간 잊어버리자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 동경에 있는 주식회사 근양해운 정희원 사장과 불고기 잘 한다는 교포식당에 마주 앉았다. 앞으로의 사업을 위해 북한의 모든 선박 총 대리점 책임자와 인사해 두는 것도 괜찮을 것도 같아 동경에 가서 그를 만난 것이다.

북한 해산물 대한민국 최초 입항

평양에서의 일들을 푸념 삼아 넋두리를 해댔다. 북한의 이런 사리에 안 맞는 일들을 바로 잡아 주는데 일익을 해달라는 부탁도 했다.

냉동 골뱅이 선적 통보를 받고 서울 거래처(여수 제일 냉동주식회사)에 연락을 하고, 서울도착 즉시 수산청에 갔다. 북한산 냉동 골뱅이가 일본 니가타항을 경유해 부산으로 오는데 법적 수속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북한에서 물건이 남한으로 온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고 또 법도 없었고 행정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경험도 없었다)

수산청은 “수입품이니까 상공부 수입과로 가서 상의 해 봐라”고 했다. 반면, 상공부는 “수산물이니까 수산청으로 가 봐라”고 서로 미루면서 필자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내일이면 일본에 도착해 즉시 컨테이너로 옮겨 부산항으로 보내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제일 냉동 측과 상의 끝에 “수출원자재 수입품”으로 수속을 하여 일단 부산항으로 가져 와서 해결해 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우여곡절 끝에 역사적으로 북한 동해안에서 잡은 골뱅이 50톤이 무려 13개월 만에(한 달에 50톤을 잡겠다고 한 것이) 일본 니가타항으로 운반되어 왔다.

껍질 채 냉동물이라 부피가 커서 20피트 컨테이너에 10톤씩, 다섯 컨테이너에 적재했다. 북한산 수산물이 최초로 부산항으로 입항하는 순간이라 신문 방송이 떠들까 은근히 걱정됐다. 당시 북한에서 한국으로 가는 물건은 전혀 거래가 불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필자는 미국 교포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북한물품이 공식적으로 부산항에 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신문방송이 요란하게 떠들어대고, 품질 문제에 시비를 걸게되면 북한이 발끈할 것이다. 그러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리가 만무하다.

그러면 남한에 판매하지 않고 일본에만 판매한다는 계약조건을 들어 다음의 거래를 문제삼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당국(?)과 의논하여 쉬쉬하도록 조치를 하고 부산 입항 즉시 여수항으로 운반해 제일냉동 보세창고에 입고하였다.

일본시장 좋아지자 바로 원가인상 요구

다음 날부터 보세구역 냉동 창고에서 껍질을 까고 500g, 1kg 씩 알맹이 살만 까 급속 냉동을 하여 포장을 하는데 여기에서 작업하는 아주머니들에게 입조심을 당부했다. 그러나 이미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포장 상자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인쇄가 돼 있으니 소문이 나갈 수밖에 없없다. 아무리 입 조심하라 해도 불가능 한 일이었다. 사무실 전화가 불이 났다. 메스컴이 달려들었다. 다행인 것은 제품이 좋고, 매스컴이 남.북 관계를 감안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지방뉴스로 간단히 끝냈다.

다행이 일본으로 보낸 제품은 별 문제없이 그런대로 일본시장에서 인정을 받았다. 나는 일본시장에서 인정을 받으면 해볼만하다는 판단으로 평양 대성총국으로 급히 장문의 텔렉스를 보냈다.

김호만 사장에게

서로가 처음 시작하는 골뱅이 잡이 사업이라 1년 반이 넘도록 50톤 정도 잡았지만, 선원들이 성의껏 제품을 잘 만들어 줘서 일본시장에서 그런대로 괜찮다는 평을 받았으니 이제부터서는 크고 작은 것 끼리 구별하고 좀 더 동결을 잘 해서 량도 많이 잡아 별도의 선박으로 본격적인 조업을 하기로 합시다. 자원은 풍부하다고 여겨집니다. 욕심 내지 말고 한달에 30톤씩만 계속적으로 잡아도 됩니다. 우리 함께 마음과 힘을 합쳐 골뱅이 사업을 꼭 성공시키기로 약속 합시다! 미국에서 김찬구 보냄.

텔렉스를 보내고 한 달이 넘었는데도 조업에 대한 중간보고가 없다. 초조하다. 다시 팩스를 보냈다. 급히 평양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무슨 사고라도 났느지 걱정이 됐다. 여기 일 때문에 다음달에 가겠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 소식이 끊어졌다. 그래서 단숨에 평양으로 달려갔다.

일본 시장에서 평가가 좋았으니 가격을 올려 달라는 것이다. 당시 국제 가격이 일본 도착 가격이 1톤에 900달러인데 나는 1,000달러를 줬다. 필자는 당시 값을 더 주는 이유를 동족이고 처음 하는 사업이라 어려움이 있더라도 선원들이 용기 잃지 말고 열심히 하자는 차원이었다.

당시 원가를 더 계산해주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1년간 가격변동 없이 이 사업에 대한 가능성 여부를 서로 판단 해 보자라고 했었다. 또 제대로 잡지도 못하면서 무슨 변덕이냐고 화를 냈다. 통신으로도 얼마든지 상담할 수 있는데도 마치 이웃사람 부르듯이 급히 오라고 하느냐? 미국이 옆집이냐? 기가 막혀 입이 바싹 탔다.

걸프전쟁 발발, 골뱅이 사업도 무산

이들은 1톤당 1,200원을 요구했다. 이 가격은 일본에서 살아서 꾸물꾸물 기어 가고 있는 골뱅이 값이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나도 살아서 기어 다니는 골뱅이라면 1,200불 준다고 했다. 자신있냐고 물었다. 이제 겨우 사업에 대한 감이 오는데 터무니없는 가격을 달라하면 나는 이 사업 못 한다고 했다.

이래저래 결론 없이 서로 신경전만 하다가 다시 협상하기로 하고 나왔다.

이래저래 가격협상을 6개월 보류하기로 하고 줄타기를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조업을 계속했다. 선원들도 익숙해질 정도가 되어 겨우 마음을 놓을 때가 되었는데 ‘걸프전쟁’으로 북한의 기름난이 심각해져 선박 운항이 전면 중단됐다.

이 전쟁으로 북한은 기름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중지시켰다. 일요일은 국가의 특별 허가 없이는 차량운행을 금지시켰고 평양의 밤은 적막강산 말 그대로였다.

나는 상식적으로 북한의 기름은 러시아나 중국에서 엄청나게 많이 들어와서 별 문제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온통 거리는 한적하고, 고기잡이배는 기름 공급이 어려워 완전히 조업중지 상태였다.

긴 세월 겨우 한 가지 품목을 개발하여 다음 해부터 정상조업이 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결국 골뱅이 잡이도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골뱅이 때문에 ‘골병’만 들고 만 셈이다.

지금도 언제든지 여건만 되면 북한 동해안 김책에서 골뱅이 잡이 어업을 꼭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김찬구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LA 동국로얄 한의과대학졸업, 미국침구한의사, 중국 국제침구의사.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졸업-북한학 석사. -세계화랑검도 총연맹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