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가 쿠데타 진압 후 나흘 만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관련자들에 대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처벌 수위에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다. 이제까지 공무원 6만여 명을 체포·해고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체포가 아직 덜 끝났다”고 밝혀, 전대미문의 숙청 바람을 예고했다.
체제 속성이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철저한 독재 시스템 속에서도 단행됐던 북한 내 쿠데타 시도 사례와 ‘공포통치’에 집착하는 김정은 정권 아래에서의 쿠데타 발발 가능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감시공화국’ 북한에서 쿠데타 발발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지만 일각에선 공포통치를 지속하고 있는 김정은에 대한 반발로 군부 내 쿠데타 발생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등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이어지고 있다.
권력 탈취 시도했지만 오히려 김일성 유일지배체제 확립시킨 8월 종파사건
실패한 쿠데타는 역설적으로 철권정치, 독재정치 강화라는 상황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이번 터키의 쿠데타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이 미묘한 까닭도 종국에는 ‘에르도안의 칼리프 제국 건설’이라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이번 쿠데타는 신이 준 선물”이라며 군 관계자 6000명을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하고 이스탄불과 앙카라 경찰 8000명과 재무부 공무원 1500명을 해임하는 등 정적 제거의 기회로 삼고 있다.
북한 김씨 일가에게도 8월 종파사건(1956년)은 정적 등을 제거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로 작용했다.
김일성 중심의 유일지배체제가 당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확립된 것은 1961년 3월 개최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기 제3차 전원회의였다. 이전에 겉으로는 파벌에 관계없이 연합구조로 이뤄졌던 북한 권력 행태는 8월 종파사건을 종점으로 김일성과 그 지지자들의 단독 구조로 변질됐다.
‘8월 종파사건’은 1956년 8월에 연안파와 일부 소련파의 주도로 김일성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모의한 북한 최대의 권력 투쟁 사건이었다. 8월 종파 사건 이후 김일성에 대해 저항할 만한 세력은 정치 중앙무대에서 대부분 사라졌고, 기층에서도 대중적으로 반혁명분자 척결 작업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된다.
6·25전쟁 후 북한의 권력지형은 전쟁 마감시기 남로당(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한 출신 간부)이 숙청된 이후로 중국과 소련의 지지를 업은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에 대항하는 형태로 분화돼 있었다.
항일투쟁시기부터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연안파는 김일성의 중공업 선차 발전 노선이 그 당시 북한이 처한 내부 조건과 환경에 맞지 않지 않는다면서 반대했고, 김일성으로의 권력 집중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들의 주장은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인민들의 생활을 우선적으로 안정시켜 주자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경제정책 노선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노선 비판의 선을 넘어 점차 권력 탈취를 위한 시도로 발전했다. 여기에 소련파가 가세해 북한 권력층은 본격적인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암투를 진행한다.
1956년 6월 1일∼7월 19일까지 김일성은 정부 대표단을 이끌고 외국 원조를 구하기 위해 구소련과 동구라파 사회주의 나라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이때를 기회라고 생각한 연안파와 소련파는 구체적으로 김일성을 권좌에서 밀어낼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결성된 반(反) 김일성 세력은 구체적 행동을 준비했다. 연안파는 당시 평양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제4군단사령관과 내무부상 리필규를 중심으로 당내 비판과 군사 쿠데타라는 두 가지 방법을 계획했다.
또한 소련파는 연안파보다 온건한 형태인 당내 비판과 소련의 협조에 의지하려는 방식을 계획하고 있었다.
반 김일성 세력들은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당내 비판을 통해, 김일성을 축출할 계획을 세웠다. 리필규는 평양 근교에 주둔중인 제4군단과 시내 방공포대, 공병부대 등과 연합해 무력시위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의 권력 전복 시도는 실행되기도 전에 김일성과 그 지지 세력들에게 알려지게 됐다. 김일성은 해외에서 정권 전복 세력의 움직임에 대해 당시 수상 대리였던 최용건의 보고를 받았다. 급히 북한으로 돌아와 8월 2일에 진행하기로 되었던 전원회의를 미뤄가며 이들을 제거할 계획을 착실히 준비해갔다.
이윽고 8월 30일 김일성은 당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의 본 안건은 두 가지로, 하나는 김일성을 위시로 한 정부 대표단의 외국방문에 대한 보고와 인민보건사업의 개선 강화를 위한 문제를 토론하기로 돼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연안파들은 의제와 관계없는 중공업 우선노선과 김일성의 개인숭배 및 당내에서 독재행위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 조직부장 김금철과 당 선전선동부 김도만 부부장 등 김일성 지지세력들이 일어나 이들의 행위를 종파로 규정해 비판했다. 회의장 분위기는 체제 전복세력에게 불리해졌고 연안파와 손잡기로 했던 소련파는 침묵을 지켰다.
연안파는 결국 반당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혀 숙청의 대상이 됐고, 이후 소련파들도 비록 전원회의에서 직접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지만 반 김일성 세력의 움직임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대부분 제거됐다.
북한 사회과학출판사에서 1987년에 출판한 ‘조선통사’에서는 당시 사건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여러 종파의 잔여분자들이 계획하여 연합된 종파도당”이라며 “외부세력을 등에 업고 나선 사대주의자들, 혁명의 변절자들인 수정주의자들의 집단이며 단순한 종파가 아니라 반혁명도당이다”고 썼다. 그러면서 ‘8월 종파투쟁’은 반종파투쟁인 동시에 반 사대주의, 반 수정주의, 반혁명과의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8월 종파사건’ 이후에도 체제 전복 시도는 있어
김일성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1967년 5월)를 계기로 갑산파(김일성 세력의 한 부분으로서 박금철, 이효순 등이 주요 인물)마저 제거하고 확고한 유일지도 체제를 확립했고 주민들의 사상까지 지배하며 장기집권의 틀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공고할 것만 같았던 북한 체제 내에서도 균열은 존재했다. 1990년대 초반의 대량 아사 시기와 이와 맞물렸던 김일성 사망 직후 김정일 초기 집권기였다.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은 존재하지만 탈북민들은 이 시기 북한 군부에서 쿠데타 등의 시도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고, 다수의 국내외 언론에서도 이 시기 북한에서의 쿠데타 발생 등에 대해 보도한 바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사건이 1992~1993년도에 발생한 ‘러시아(구 소련) 푸룬제 군사아카데미 출신 반역모의 사건’과 1995년도에 발생한 ‘6군단 쿠데타 모의사건’이다.
사회주의권 붕괴로 대외적 환경이 극도로 악화된 가운데 북한 군 간부들의 체제 전복 시도로 알려진 ‘푸룬제 사건’은 북한 체재 내의 위기감을 증폭시켰고, 북한 당국은 이 당시 처음으로 ‘군 보위일꾼대회(1993년)’를 개최하기도 했다. 보위일꾼은 방첩을 비롯한 보안 기능을 수행하는 군부 내 반체제 움직임을 감시하는 핵심 요원들을 말한다.
‘6군단 쿠데타 모의사건’은 김정일 정권에게 가장 치명적인 위협을 가했던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함경북도 청진 인민군 무력부 6군단에서 정치위원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모의하다 발각, 장성급을 포함 군 간부 및 그 가족 등 40여 명이 처형당한 대형사건을 말한다.
1999년도에 워싱턴 타임즈 빌 거츠 기자는 자신의 저서 ‘배반’에서 1995년 북한 인민군 6군단 소속 장병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다 진압됐다는 사실을 미국정부의 극비문서를 인용해 소개하기도 했다.
고모부(장성택)마저 무참히 처형하는 김정은 체제서 군부 쿠데타 가능할까
이처럼 김씨 일가의 유일지배체제 구축 전후로도 북한 내부에서는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또는 반체제 운동이 존재했었다. 그렇다면 고모부 장성택 마저 반당반혁명 종파행위를 했다면서 무참히 처형하는 등 공포정치를 구사하는 김정은 정권 내에서 군부 쿠데타의 발생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전문가들은 북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은 있지만, 성공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입을 모은다.
북한 고위 군관 출신 탈북민은 21일 데일리NK에 “과거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북한에서 쿠데타 등이 실제로 발발한 적은 없고, 모두 시도하기도 전에 발각돼서 처형됐다”면서 “이는 북한이 얼마나 감시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인지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군부대 내에 고위 계급서부터 말단 병사까지 감시하는 체계가 구축돼 있고, 각급 부대도 서로를 감시하게 돼 있다”면서 “예를 들어서 인민무력부는 호위사령부가 감시하고 호위사령부는 평양방어사령부가 감시하는 식이다. 또한 이들 부대 각자가 쿠데타 등의 시도가 있을 때 이를 진압할 수 있는 자체적인 ‘무력’이 있기 때문에 쿠데타의 성공 가능성이 지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김광인 코리아선진화연대 소장은 “쿠데타는 일정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주도해야 하는데, 북한은 고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을 만큼 통제가 엄격해진다”면서 “쿠데타 등을 시도하기 위한 조직 구축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어 (쿠데타) 모의 자체가 힘들다”고 지적했다.
염돈재 전 국정원 1차장은 “우선 북한에서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설은 제기됐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지적한 후, “무엇보다 현재 김정은을 축출하고 북한 정권을 이어 받아 생존할 수 있는 세력이 없다는 점에서 쿠데타 시도 가능성 자체가 매우 낮다”고 밝혔다.
염 전 차장은 “북한은 김씨 일가의 3대 세습·백두혈통에 기대지 않고서는 체제를 지탱하기가 힘들어 보인다”면서 “군부 일부의 반란은 존재할 지도 모르지만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서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다”고 부연했다.
북한의 감시체제가 군부는 물론 주민들의 생활을 옥죄고 있어 쿠데타 발생 가능성이 희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능성이 완벽히 차단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내부 정보를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외부와 힘을 합쳐 쿠데타 모의를 진행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은 정치지도위원이라고 하는 군 내부의 정치 장교가 개인 사상 동향 등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검사하는 감시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야전군이 움직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북한에서 쿠데타 발발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조 선임연구위원은 이어 “(물론 가능성이 낮아 보이지만) 김정은의 호위 세력 등 이른바 공안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면서 “모든 상황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쿠데타를 주도한다면 감시체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민군 상좌 출신인 최주활 탈북자동지회 회장 역시 “북한 정치 구조를 봤을 때 내부의 힘만으로 쿠데타를 성공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다”면서도 “김정은 측근 경호 세력의 개입 또는 외부와의 연계된 쿠데타 세력이라면 성공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