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머지고 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


지난 10일 타계한 故 황장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이 2008년 1월 1일에 쓴 미공개 시(詩)를 본지가 단독 입수했다. 


이 시는 황 위원장이 망명 10주년을 기념해 지인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담아 보내는 형식을 띄고 있다. 사실상 황 위원장의 ‘마지막 유작(遺作) 시’ 라는 것이 측근들의 설명이다. 평소 친한 지인들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을 만큼 과묵했던 황 위원장이 한국에서 보낸 10년 세월에 대한 소회와 남은 여생에 대한 각오를 담담하게 다짐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시를 보관하고 있던 황 위원장의 지인은 “황 선생님이 워낙 자기 절제력이 강하고 이성적이셨던 분이라,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신 경우가 거의 없다”면서 “스스로 짊어지신 북한 민주화라는 짐의 무게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속에 고뇌했던 황장엽 선생의 내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중한 유작”이라고 설명했다.      


“지루한 밤은 가고~”로 시작되는 도입부에서는 1997년 국내 입국 이후 10년간 계속됐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햇볕정책’이 끝을 다하고 있다는 기대감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사회의 대북인식이 허술함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이어 자신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한 듯 ‘영원한 밤의 사절’ ‘떠나야할 시간’ 등의 표현으로 인생의 마지막 장을 암시했다. 그러면서도 “밝은 앞날 보려는 미련 달랠 길 없어”라는 문구를 통해 죽기전에 북한 민주화 및 남북통일을 지켜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피력했다.


황 위원장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비교적 차분한 묘사를 유지했지만, 자신이 못다 이룬 꿈과 과제를 유산으로 남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격정적인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가나/ 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정든 산천과 갈라진 겨레는 또 어떻게 하고”라는 대목에서는 황 위원장이 평소 아끼던 인간중심 철학 제자들과 국내 탈북자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더불어 ‘민족 분단’에 대한 사상가적 고뇌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는 후반부에서 황 위원장은 “때는 늦었고 남은 건 마지막 순간뿐”이라며 “여한 없이 최선 다해 받들고 가자”고 다짐했다.


마지막 문장 “삶을 안겨준 어버이의 거룩한 뜻 되새기며”에는 황 위원장의 인생관의 집약되어 있다는 평가다. 


황 위원장은 2001년 발간한 저서 ‘인강중심철학 인생관’ 등에서 “우리의 육체적 생명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지만, 민족, 더 나아가 인류로 부터 받은 ‘사회적 생명’도 있다”면서 “민족과 인류의 발전을 위해 한 생을 값있게 살았다면 그것이 바로 ‘보람 있는 삶'”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故 황장엽 북한민주화 위원장의 마지막 詩]


지루한 밤은 가고
새 아침은 밝아온 듯 하건만
지평선에 보이는 검은 구름이
다가오는구나.



영원한 밤의 사절이
찾아오는구나.



벌써 떠나야 할 시간이라고
이 세상 하직할 영이별 시간이라고.


값없는 시절과 헤어짐은
아까울 것 없건만
밝은 앞날 보려는 미련
달랠 길 없어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가나
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
정든 산천과 갈라진 겨레는
또 어떻게 하고.



때는 늦었고 남은 건
마지막 순간뿐.
여한 없이 최선 다해 받들고 가자.
삶을 안겨준 어버이의
거룩한 뜻 되새기며.


2008.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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